월요일, 12월 24, 2007
화요일, 12월 18, 2007
목요일, 12월 06, 2007
Images à la sauvette #7
토요일, 11월 17, 2007
미녀
얼마 전에 본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에 나온 '자밀라'라는 여성 출연자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다. 이유는 그녀가 상당한 미모와 색기를 자랑하는 미인이기 때문인데, 검색 엔진 등에서는 그녀의 나라인 ‘우즈베키스탄’을 두고 ‘우즈벸에서는 김태희가 밭에서 호미질하고 한예슬이 과일 장수한다.’라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
방송에서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보자마자 ‘모니카 벨루치’를 떠올렸는데 그 건 ‘자밀라’씨의 외모가 ‘모니카 벨루치’와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내가 ‘모니카 벨루치’의 팬이 된 것은 그녀의 외모가 가히 이상적인 미형에 거의 극한까지 근접했기 때문이었다. 유럽 여행 중에는 그런 분위기의 여성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많이 보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미녀가 최고라는 편견일 가능성이 높은 성급한 일반화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우즈베키스탄도 추가해야하나?
미녀와 미녀에 열광하는 남자들을 반감어린 시선으로 보는 여자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건 미녀를 좆는 남자에게 문제가 있거나 그들의 탓이 아니다. 대우주의 의지가 남자라는 존재를 그렇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자연을 탓하던지.. 아니면 그냥 받아들여라
이성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에 크게 의존하는 남자가 그 반대가 되면 남자가 남자를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거라고 본다. 사실, 남자들이 시각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여성의 아름다움도 수많은 남자들이 느끼고 알아주는 것 아닌가.. 비록, 여자들은 주목받길 원하면서도 일반적인 남자들의 시선을 혐오하기도하는 모순된 감성을 지닌 존재들이긴 하지만..
원래, 남자라는 존재는 자신의 이성으로 통제하고 있어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여러 여자에게 자신의 2세를 잉태시키도록 본능이란 시스템에 입력이 되어있다.
반대로, 여자는 여러 남자에게 자신의 유전 데이터를 결합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유전자와 섞어 2세에게 이어내릴 남자의 품질에 집중하도록 되어있다.
이 두 가지 본성의 상호작용으로 인간이란 종족은 ‘질과 양’ 모두에 있어 발전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같은 주에 ‘인간 극장’이란 프로에 미국 치과의사 자격증을 가진 치의학 박사로서 서울대 치대 교수에 가수, 영어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얼굴도 꽤 예쁜 여자가 35세라는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내용이 나왔다. 이 건 위의 논리에 상당히 잘 부합된다고 본다. 사실 방송에 이런 부류의 여자들이 나오는 걸 전에도 보았는데, 이들의 눈에 사회의 일반적 통념에 기인하는 자신의 가치보다 떨어지는 능력을 가진 남자는 이성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여자들 중 나이를 먹을수록 남자의 능력에만 더더욱 치중하게 되어 결국, 노처녀가 되는 사례를 많이 보았다. 역시 결혼이란 건 뭣 모를 시기에 해야 하는 것..
일요일, 10월 28, 2007
Images à la sauvette #6
※이 포스트의 사진은 도용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면 법적 책임과 블로그 주인의 응징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볼 수 있습니다.
쥐와의 거리 90cm
지금까지 찍은 사진 중에 최고
내게 있어 사진의 의미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자신의 취미가 사진을 찍는 것이라면 그 취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제게 있어서 사진 취미는 제가 일상 속에서 본 것, 느낀 것, 생각한 것을 그리고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미묘한 그 순간을 한 장의 사진에 잡아두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 속에서 그냥 지나쳐버리고 무심해지기 쉬운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집중해서 바라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사진을 찍는다는 건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냅 사진을 주로 하는 ‘스냅퍼’가 되었습니다.
스냅 사진을 우습게 아는 사람들은 사진에 있어서의 감성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겠지요..
저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찍는 사진보다는 생활감이 있는 자연스러운 사진이 좋습니다. 그래서 캔디드 포토(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사진)도 찍고 있습니다. ‘스냅퍼’란 건 결국 도촬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상한 변태 도촬은 하지 않으므로 ‘페티쉬’와는 구분됩니다.
저도 인물 사진을 찍을 때는 소재주의(찍을 것을 만들어서 찍는다.)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사진들은 결과물을 기대한 다기 보다는 찍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
필름으로 찍던 디지털로 찍던 아무생각 없이 셔터를 누르면 아무생각 없는 사진이 나옵니다. 사진이라는 것은 결국 찍는 사람의 마음이 반영되지요..'_'
※사진을 클릭하면 좀 더 큰 사이즈로 볼 수 있습니다.
내게 있어 사진의 의미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자신의 취미가 사진을 찍는 것이라면 그 취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제게 있어서 사진 취미는 제가 일상 속에서 본 것, 느낀 것, 생각한 것을 그리고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이 미묘한 그 순간을 한 장의 사진에 잡아두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 속에서 그냥 지나쳐버리고 무심해지기 쉬운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집중해서 바라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사진을 찍는다는 건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냅 사진을 주로 하는 ‘스냅퍼’가 되었습니다.
스냅 사진을 우습게 아는 사람들은 사진에 있어서의 감성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겠지요..
저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찍는 사진보다는 생활감이 있는 자연스러운 사진이 좋습니다. 그래서 캔디드 포토(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사진)도 찍고 있습니다. ‘스냅퍼’란 건 결국 도촬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상한 변태 도촬은 하지 않으므로 ‘페티쉬’와는 구분됩니다.
저도 인물 사진을 찍을 때는 소재주의(찍을 것을 만들어서 찍는다.)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사진들은 결과물을 기대한 다기 보다는 찍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
필름으로 찍던 디지털로 찍던 아무생각 없이 셔터를 누르면 아무생각 없는 사진이 나옵니다. 사진이라는 것은 결국 찍는 사람의 마음이 반영되지요..'_'
일요일, 9월 23, 2007
미투데이
시작이란 항상 그렇다.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존재하며 다음 순간에는 모든 것이 상실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셨다.. 내가 직접 타서 마실 때는 설탕과 크림을 넣지 않고 블랙으로 마시는데 이렇게 된 것은 담배와 술 맛을 알고부터다.. 담배는 끊었고 술은 되도록 마시지 않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 후에 블랙커피의 맛을 알게 되었다. 보통 어른의 맛이네 어쩌네 하지만 역시 미묘한 맛이다. 쓴 맛을 즐긴 달까..
컵을 사용할 때 금속 컵을 선호하는 편인데 그건 탄산음료나 맥주는 금속 컵이 아니면 입술에 닿는 감촉의 영향으로 그다지 맛있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셨다.. 내가 직접 타서 마실 때는 설탕과 크림을 넣지 않고 블랙으로 마시는데 이렇게 된 것은 담배와 술 맛을 알고부터다.. 담배는 끊었고 술은 되도록 마시지 않으려고 하고 있지만 그 후에 블랙커피의 맛을 알게 되었다. 보통 어른의 맛이네 어쩌네 하지만 역시 미묘한 맛이다. 쓴 맛을 즐긴 달까..
컵을 사용할 때 금속 컵을 선호하는 편인데 그건 탄산음료나 맥주는 금속 컵이 아니면 입술에 닿는 감촉의 영향으로 그다지 맛있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토요일, 8월 25, 2007
라이카를 사랑한 남자 #4 ~‘엔조’씨의 초이스~
얼마 전부터 고민거리 중에 하나였던 두 개의 ‘칼 짜이스’ 렌즈 ‘조나’와‘플라나’ 너무 카메라 오타쿠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하지만(←이미 갖고 있는 취미에 관한한 모조리 오타쿠적..-┏;;;) 광학적 구조 및 성격이 판이한데도 그 선택이 너무도 힘들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 중에 사진에 관한한 가장 존경하고 있는 ‘엔조’씨께 질문을 했다.
돌아온 답변은..
シーピーユー パンクさん
ソナーとプラナーの比較は、つまるところ「明るさと最短撮影距離のどちらを優先するか」というところに行き着きます。
最短撮影距離って、意外と大事ですよね。90cmのゾナーか、70cmのプラナーか。この20cmの差は、意外と大きいです。
ただし、レンジファインダーはもともとテーブルフォト向きの機材ではありませんので、2~3m先のものを撮るためのスナップレンズという風に割り切れば、ゾナーでも何の問題もないと思います。
言い換えると、ご自身が日頃50mmでどんな写真を撮っているかを思い返してみることで、自然と「最短距離が重要かどうか」が決まってく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僕の個人的な好みでは、ゾナーの明るさとコンパクトさに惹かれます。でも、既に持っているノクトンとすべてのスペックが重なってしまうので、購入するまで至っていません。
(2007.08.24 16:37:44)
시피유 팡크씨
‘조나’와 ‘플라나’의 비교는 결국,「밝기와 최단 촬영 거리 중 어느 쪽이 우선인가?」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최단 촬영 거리란 건, 의외로 중요하지요. 90cm의 ‘조나’인가, 70cm의 ‘플라나’인가. 이 20cm의 차이는, 의외로 큽니다.
다만, 거리계는 원래 ‘테이블 포토’ 지향의 기재가 아니기 때문에, 2~3m앞의 것을 찍기 위한 스냅 렌즈라고 하는 식으로 결론지으면, ‘조나’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평소 50mm로 어떤 사진을 찍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으로, 자연히「최단 거리가 중요한가? 어떤가?」가 정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저의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조나’의 밝기와 컴팩트함에 끌립니다. 그래도, 이미 갖고 있는 ‘녹턴’과 모든 스펙이 겹쳐 버리기 때문에, 구입할 정도는 아니네요.
돌아온 답변은..
シーピーユー パンクさん
ソナーとプラナーの比較は、つまるところ「明るさと最短撮影距離のどちらを優先するか」というところに行き着きます。
最短撮影距離って、意外と大事ですよね。90cmのゾナーか、70cmのプラナーか。この20cmの差は、意外と大きいです。
ただし、レンジファインダーはもともとテーブルフォト向きの機材ではありませんので、2~3m先のものを撮るためのスナップレンズという風に割り切れば、ゾナーでも何の問題もないと思います。
言い換えると、ご自身が日頃50mmでどんな写真を撮っているかを思い返してみることで、自然と「最短距離が重要かどうか」が決まってく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僕の個人的な好みでは、ゾナーの明るさとコンパクトさに惹かれます。でも、既に持っているノクトンとすべてのスペックが重なってしまうので、購入するまで至っていません。
(2007.08.24 16:37:44)
시피유 팡크씨
‘조나’와 ‘플라나’의 비교는 결국,「밝기와 최단 촬영 거리 중 어느 쪽이 우선인가?」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최단 촬영 거리란 건, 의외로 중요하지요. 90cm의 ‘조나’인가, 70cm의 ‘플라나’인가. 이 20cm의 차이는, 의외로 큽니다.
다만, 거리계는 원래 ‘테이블 포토’ 지향의 기재가 아니기 때문에, 2~3m앞의 것을 찍기 위한 스냅 렌즈라고 하는 식으로 결론지으면, ‘조나’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평소 50mm로 어떤 사진을 찍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으로, 자연히「최단 거리가 중요한가? 어떤가?」가 정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저의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조나’의 밝기와 컴팩트함에 끌립니다. 그래도, 이미 갖고 있는 ‘녹턴’과 모든 스펙이 겹쳐 버리기 때문에, 구입할 정도는 아니네요.
역시 모두 사용해 보는 게 나을 것 같다..ㅡ_ㅡ;;
수요일, 8월 22, 2007
라이카를 사랑한 남자 #3 ~나의 제3의 눈~
지금 사용하는 카메라.. 찍을 때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카메라입니다. 전자 부품은 전혀 들어있지 않고 물론, 전지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제 손으로 돌리고 장전하고.. 측광조차도 눈으로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쓰는 카메라가 명기로 이름난 카메라이지만 장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손에 넣자마자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 방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진을 직업으로 하는 사진사 중에 많은 수가 “일로 사진을 찍을 때는 편리한 디지털 카메라가 좋지만 취미로 사진을 찍을 때는 손이 많이 가는 매뉴얼기가 좋다.”라고 하더군요..
매뉴얼기와 매뉴얼 지향은 다릅니다.. 자동모드와 매뉴얼 모드를 모두 쓸 수 있는 것은 매뉴얼 지향이지요.. 근데 사람이란 본래 게을러서 자동 모드 위주로 쓰게 됩니다. 사람이 찍는다기보다 카메라라는 로봇이 제멋대로 정해서 사진을 찍는 것이지요. AE만 달려있어도 사람은 그것에 의지합니다.
처음 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가 또렷하게 생각납니다. 정말 말 그대로 사진으로 나와 주기만 해도 좋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살짝 긴장이 되었죠. 마치 카메라가 제게 “흥! 어디 나를 가지고 찍을 테면 찍어봐!”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디지털이 아니므로 찍은 후에 확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현상이 된 필름을 보는 순간의 기쁨은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난 것이었지요..(^-^;
일요일, 8월 19, 2007
사랑의 릴레이
어제 그 맛있다는 고기 튀김을 먹으러 나갔다가 'Voigtländer Club'의 'aias'님과 'Eastrain'님께 멋진 물건을 사릴(사랑의 릴레이, 쉬운 한마디로 "너 가져") 받았다.
1. Ritzenhoff / Herbst . Autumn 2000
위 사진의 물건으로 이게 뭐냐면 리젠호프사 2000년 컬렉션 재떨이로 총 23명의 유명 화가 및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이루어 진 컬렉션인데 그 중에서 내가 받은 건 'Ambrogio Pozzi'의 작품이 프린트 되어 있다. 2000년 당시 오프 가격이 약 10만원, 온라인 가격이 8만원을 넘는 제품 이었음에도 금방 품절된 걸로 알고 있는데 구성은 나무케이스에 작은 책자가 같이 들어있었다. 미사용 신품을 주시다니..ㅎㄷㄷ
사진에서는 별로 안 느껴지지만 실물을 보면 투명한 느낌이 끝내준다. 마치 투명한 얼음을 보는 것과 같아서 푹푹 찌는 날씨에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재질이 크리스털 유리라고 하는 투명도가 굉장히 높은 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 주로 고급 와인 잔, 샹들리에(베르사이유 궁전에도 쓰임) 등에서 볼 수 있는 재질이다. 크리스털 유리는 맑고 아름답지만 조금만 잘못 다루면 아주 쉽게 깨지고 다시 붙이기도 힘든데다 붙여도 상처가 남아 또 다시 깨지기 쉬워 재미있게도 남녀 관계에 흔히 비유되곤 한다. 조심해야지..ㄷㄷ
이런 멋진 물건을 주신 'aias'님과 'Eastrain'님께 감사드립니다..ㅎㅅㅎb
위 사진의 물건으로 이게 뭐냐면 리젠호프사 2000년 컬렉션 재떨이로 총 23명의 유명 화가 및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이루어 진 컬렉션인데 그 중에서 내가 받은 건 'Ambrogio Pozzi'의 작품이 프린트 되어 있다. 2000년 당시 오프 가격이 약 10만원, 온라인 가격이 8만원을 넘는 제품 이었음에도 금방 품절된 걸로 알고 있는데 구성은 나무케이스에 작은 책자가 같이 들어있었다. 미사용 신품을 주시다니..ㅎㄷㄷ
사진에서는 별로 안 느껴지지만 실물을 보면 투명한 느낌이 끝내준다. 마치 투명한 얼음을 보는 것과 같아서 푹푹 찌는 날씨에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재질이 크리스털 유리라고 하는 투명도가 굉장히 높은 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 주로 고급 와인 잔, 샹들리에(베르사이유 궁전에도 쓰임) 등에서 볼 수 있는 재질이다. 크리스털 유리는 맑고 아름답지만 조금만 잘못 다루면 아주 쉽게 깨지고 다시 붙이기도 힘든데다 붙여도 상처가 남아 또 다시 깨지기 쉬워 재미있게도 남녀 관계에 흔히 비유되곤 한다. 조심해야지..ㄷㄷ
이런 멋진 물건을 주신 'aias'님과 'Eastrain'님께 감사드립니다..ㅎㅅㅎb
토요일, 8월 04, 2007
Images à la sauvette #2
금요일, 8월 03, 2007
수요일, 8월 01, 2007
MK군의 굴욕
화요일, 7월 10, 2007
레고
목요일, 5월 31, 2007
수요일, 5월 30, 2007
ZARD 사망
ZARD의 싱어 송 라이터 '사카이 이즈미(坂井泉水(いずみ))(본명・카마치 사치코(蒲池幸子)'씨가 2007년 5월 27일 오후, 향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목소리였고 저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를 물들여주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충격이고 슬픕니다. 이로써 제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아티스트들은 모두 사망하거나 해체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것이 '사카이 이즈미'씨..
40세의 나이까지 혼자 살고 거기다 암 투병 중이었던 그녀의 어이없는 사망 소식.. 마치 슬픈 영화처럼 가버렸네요..
reference
http://www.yomiuri.co.jp/index.htm
ZARD 사카이 이즈미씨, 투병중인 병원에서 추락사
2007년 05월 28일 12시 20분
「ZARD」의 보컬이자 작사가인 坂井泉水(さかい・いずみ(사카이・이즈미)씨(40)=본명·蒲池(카마치)幸子(사치코)=씨가 27일 오후, 좌뇌상으로, 도쿄 신주쿠의 케이오 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것이 28일 알려졌다.
사카이씨는 작년 6월, 자궁경부암을 앓아,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다. 소속 사무소등에 의하면, 26일 이른 아침, 일과인 산책을 한 후에 병실로 돌아오는 도중 , 병원의 비상용 슬로프의 난간으로부터 추락했다고 한다.
경시청 요츠야서의 조사로는, 26일 오전 5시 40분쯤, 병원의 슬로프 근처에 사카이씨가 넘어져 있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이 찾아냈다. 난간(높이 약 1미터)에 남아 있던 지문 등에서, 높이 약 3미터의 곳부터 슬로프 바깥쪽으로 추락했다고 보여져 자세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사카이씨는, 모델로서 활동하고 있던 91년, 「Goodbye My Loneliness」로 데뷔.「揺れる想(おも)い」 「君がいない」 등, 차례차례로 대히트를 날렸다.164만매(오리콘 조사)를 판매한「負けないで」는, 94년의 선발 고교 야구의 입장 행진곡이 되었다.
한편, 작사가로서 인기 아티스트에게 악곡을 제공, 테레사·텐의 「あなたと共に生きてゆく」나 DEEN의 「瞳そらさないで」등의 히트 곡을 낳았다. 뛰어난 경력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출연을 앞에 두고 한정된 영상 밖에 공개하지 않는 등, 독특한 노출 수법으로 화제를 모았다.
작년 데뷔 15주년을 맞이해 이번 가을에는 신 앨범의 발매를 예정.3년만의 투어도 준비되어 있었다. 원래 팝스 그룹이었지만, 올해는 사카이씨가 「ZARD」의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reference
http://www.asahi.com/
「ZARD / 사카이 이즈미 씨를 그리워하는 모임」의 안내
ZARD 의 보컬 / 작사가·사카이 이즈미 씨는, 1991년 2월 10일의 데뷔 이래 지금까지 쭉 세상의 사람들에게 노래를 통해 마음의 평온함을 계속 주어 왔습니다.
1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음악 활동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앞으로도 잊혀질 리가 없는 노래를 남길 수 있었던 것도,ZARD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신 팬 여러분들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 모두의 덕분입니다.
사카이 이즈미 씨가 타계하게 된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만,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목소리로 여러분을 격려해, 또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갈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또, 그것이 사카이 이즈미 씨의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스탭 일동이라도, 그 소원을 소중히 해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사카이 이즈미 씨를 그리워하며, 아래와 같이 , 팬 분들이나 관계자 여러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음악장」을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나갈ZARD 의 음악을 느껴 사카이 이즈미 씨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행사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많은 여러분의 참가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ZARD / 사카이 이즈미 씨를 그리워하는 모임 사무국」
【 기 】
1, 날짜 2007 년6 월27 일 ( 수)
1, 시간 미정
1, 장소 아오야마 장의소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오야마 2-33-20
1, 문의 B-Gram Records. / TEL : 03-3479-2371
*상세한 일정은, 후일 홈 페이지 등에서 공표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헌화 받아, 정말로 감사합니다.
도쿄·오사카에 있는 헌화대에 대해서는, 5월 31일(목)까지라고 합니다.
reference
http://wezard.net/index.html
40세의 나이까지 혼자 살고 거기다 암 투병 중이었던 그녀의 어이없는 사망 소식.. 마치 슬픈 영화처럼 가버렸네요..
reference
http://www.yomiuri.co.jp/index.htm
ZARD 사카이 이즈미씨, 투병중인 병원에서 추락사
2007년 05월 28일 12시 20분
「ZARD」의 보컬이자 작사가인 坂井泉水(さかい・いずみ(사카이・이즈미)씨(40)=본명·蒲池(카마치)幸子(사치코)=씨가 27일 오후, 좌뇌상으로, 도쿄 신주쿠의 케이오 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것이 28일 알려졌다.
사카이씨는 작년 6월, 자궁경부암을 앓아,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다. 소속 사무소등에 의하면, 26일 이른 아침, 일과인 산책을 한 후에 병실로 돌아오는 도중 , 병원의 비상용 슬로프의 난간으로부터 추락했다고 한다.
경시청 요츠야서의 조사로는, 26일 오전 5시 40분쯤, 병원의 슬로프 근처에 사카이씨가 넘어져 있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이 찾아냈다. 난간(높이 약 1미터)에 남아 있던 지문 등에서, 높이 약 3미터의 곳부터 슬로프 바깥쪽으로 추락했다고 보여져 자세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사카이씨는, 모델로서 활동하고 있던 91년, 「Goodbye My Loneliness」로 데뷔.「揺れる想(おも)い」 「君がいない」 등, 차례차례로 대히트를 날렸다.164만매(오리콘 조사)를 판매한「負けないで」는, 94년의 선발 고교 야구의 입장 행진곡이 되었다.
한편, 작사가로서 인기 아티스트에게 악곡을 제공, 테레사·텐의 「あなたと共に生きてゆく」나 DEEN의 「瞳そらさないで」등의 히트 곡을 낳았다. 뛰어난 경력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출연을 앞에 두고 한정된 영상 밖에 공개하지 않는 등, 독특한 노출 수법으로 화제를 모았다.
작년 데뷔 15주년을 맞이해 이번 가을에는 신 앨범의 발매를 예정.3년만의 투어도 준비되어 있었다. 원래 팝스 그룹이었지만, 올해는 사카이씨가 「ZARD」의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reference
http://www.asahi.com/
「ZARD / 사카이 이즈미 씨를 그리워하는 모임」의 안내
ZARD 의 보컬 / 작사가·사카이 이즈미 씨는, 1991년 2월 10일의 데뷔 이래 지금까지 쭉 세상의 사람들에게 노래를 통해 마음의 평온함을 계속 주어 왔습니다.
1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음악 활동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앞으로도 잊혀질 리가 없는 노래를 남길 수 있었던 것도,ZARD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신 팬 여러분들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 모두의 덕분입니다.
사카이 이즈미 씨가 타계하게 된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만,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목소리로 여러분을 격려해, 또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갈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또, 그것이 사카이 이즈미 씨의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스탭 일동이라도, 그 소원을 소중히 해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사카이 이즈미 씨를 그리워하며, 아래와 같이 , 팬 분들이나 관계자 여러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음악장」을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나갈ZARD 의 음악을 느껴 사카이 이즈미 씨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행사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많은 여러분의 참가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ZARD / 사카이 이즈미 씨를 그리워하는 모임 사무국」
【 기 】
1, 날짜 2007 년6 월27 일 ( 수)
1, 시간 미정
1, 장소 아오야마 장의소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오야마 2-33-20
1, 문의 B-Gram Records. / TEL : 03-3479-2371
*상세한 일정은, 후일 홈 페이지 등에서 공표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헌화 받아, 정말로 감사합니다.
도쿄·오사카에 있는 헌화대에 대해서는, 5월 31일(목)까지라고 합니다.
reference
http://wezard.net/index.html
목요일, 5월 17, 2007
Cartier-Bresson, Henri
Henri Cartier-Bresson
French photographer whose humane, spontaneous photographs helped establish photojournalism as an art form. His theory that photography can capture the meaning beneath outward appearance in instants of extraordinary clarity is perhaps best expressed in his book Images à la sauvette (1952; The Decisive Moment).
Cartier-Bresson was born and attended school in a village not far from Paris. In 1927–28 he studied in Paris with André Lhote, an artist and critic associated with the Cubist movement. Lhote implanted in him a lifelong interest in painting, a crucial factor in the education of his vision. In 1929 Cartier-Bresson went to the University of Cambridge, where he studied literature and painting.
As a boy, Cartier-Bresson had been initiated into the mysteries of the simple “Brownie” snapshot camera. But his first serious concern with the medium occurred about 1930, after seeing the work of two major 20th-century photographers, Eugène Atget and Man Ray. Making use of a small allowance, he traveled in Africa in 1931, where he lived in the bush, recording his experiences with a miniature camera. There he contracted blackwater fever, necessitating his return to France. The portability of a small camera and the ease with which one could record instantaneous impressions must have struck a sympathetic chord, for in 1933 he purchased his first 35-mm Leica. The use of this type of camera was particularly relevant to Cartier-Bresson. It lent itself not only to spontaneity but to anonymity as well. So much did Cartier-Bresson wish to remain a silent, and even unseen, witness, that he covered the bright chromium parts of his camera with black tape to render it less visible, and he sometimes hid the camera under a handkerchief. The man was similarly reticent about his life and work.
Hyères, France, gelatin silver print by Henri Cartier-Bresson, …Courtesy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All Rights Reserved, Julien Levy Collection, gift of Jean and Julien Levy, 1975.1134In more than 40 years as a photographer, Cartier-Bresson wandered continually around the world. But there was nothing compulsive about his travels, and he explicitly expressed a desire to move slowly, to “live on proper terms” in each country, to take his time, so that he became totally immersed in the environment.
In 1937 Cartier-Bresson produced a documentary film, his first, on medical aid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date also marked his first reportage photographs made for newspapers and magazines. His enthusiasm for filmmaking was further gratified when, from 1936 to 1939, he worked as an assistant to the film director Jean Renoir in the production of Une Partie de campagne (A Day in the Country) and La Règle du jeu (The Rules of the Game). As a photographer he felt indebted to the great films he saw as a youth. They taught him, he said, to choose precisely the expressive moment, the telling viewpoint. The importance he gave to sequential images in still photography may be attributed to his preoccupation with film.
In 1940, during World War II, Cartier-Bresson was taken prisoner by the Germans. He escaped in 1943 and the following year participated in a French underground photographic unit assigned to record the German occupation and retreat. In 1945 he made a film for the U.S. Office of War Information, Le Retour, which dealt with the return to France of released prisoners of war and deportees.
Though Cartier-Bresson's photographs had been exhibited in 1933 in the prestigious Julien Levy Gallery in New York City, a more important tribute was paid to him in 1947, when a one-man exhibition was held in that city's Museum of Modern Art. In that same year, Cartier-Bresson, in partnership with the U.S. photographer Robert Capa and others, founded the cooperative photo agency known as Magnum Photos. The organization offered periodicals global coverage by some of the most talented photojournalists of the time. Under the aegis of Magnum, Cartier-Bresson concentrated more than ever on reportage photography. The following three years found him in India, China, Indonesia, and Egypt. This material and more, taken in the 1950s in Europe, formed the subjects of several books published between 1952 and 1956. Such publications helped considerably to establish Cartier-Bresson's reputation as a master of his craft. One of them, and perhaps the best known, Images à la sauvette, contains what is probably Cartier-Bresson's most comprehensive and important statement on the meaning, technique, and utility of photography. The title refers to a central idea in his work—the decisive moment—the elusive instant when, with brilliant clarity, the appearance of the subject reveals in its essence the significance of the event of which it is a part, the most telling organization of forms. Later books include Cartier-Bresson's France (1971), The Face of Asia (1972), and About Russia (1974).
He was singularly honoured by his own country in 1955, when a retrospective exhibition of 400 of his photographs was held at the Museum of Decorative Arts in Paris and was then displayed in Europe, the United States, and Japan before the photographs were finally deposited in the Bibliothèque Nationale (National Library) in Paris. In 1963 he photographed in Cuba; in 1963–64, in Mexico; and in 1965, in India. The French filmmaker Louis Malle recalled that, during the student revolt in Paris in May 1968 Cartier-Bresson appeared with his 35-mm camera and, despite the explosive activities, took photographs at the rate of only about four per hour.
In the late 1960s Cartier-Bresson began to concentrate on making motion pictures—including Impressions of California (1969) and Southern Exposures (1971). He believed that still photography and its use in pictorial magazines was, to a large extent, being superseded by television. On principle, he always avoided developing his own prints, convinced that the technical exigencies of photography were a harmful distraction. Similarly, he directed the shooting of films and did not wield the camera himself. With this medium, however, he was no longer able to work unobtrusively by himself. Cartier-Bresson devoted his later years to drawing.
His Leica—his notebook, as he called it—accompanied him wherever he went, and, consistent with his training as a painter, he always carried a small sketch pad. There was for Cartier-Bresson a kind of social implication in the camera. To his mind, photography provided a means, in an increasingly synthetic epoch, for preserving the real and humane world.
Aaron Scharf
앙리 까르띠에-브레송
그의 인간적이며 자연스러운 사진들은 보도사진이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숨어 있는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라는 그의 이론은 저서인 〈결정적 순간 Images à la sauvette〉(1952)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파리 근교에서 태어나 그곳 학교에 다녔으며, 1927~28년 파리에서 입체파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예술가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로트와 공부했다. 로트는 카르티에가 회화에 대해 평생의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인물이었는데 사물을 보는 훈련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29년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문학과 회화를 공부했다.
소년시절 간단한 브라우니, 스냅샷 카메라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그 매체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1930년경 20세기의 두 중요한 사진작가인 외젠 아제와 맨 레이의 작품을 보고 나서였다. 그는 얼마간의 비용을 마련해 1931년 아프리카의 오지에 살면서 소형(35㎜)사진기로 자신이 겪은 것들을 기록했으며, 흑수열병에 걸려 불가피하게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소형사진기의 휴대성과 즉각적인 인상을 쉽게 기록할 수 있는 편리성에 공감하게 된 그는 1933년 35㎜ '라이카' 사진기를 샀다. 이런 종류의 사진기는 그에게 특히 잘 맞았는데 자연스러움뿐만 아니라 익명의 상태로 촬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소리내지 않고 심지어는 보이지도 않고, 남의 눈에 띄는 것을 몹시 꺼려했기 때문에 사진기 렌즈의 밝은 크롬 부분을 검정 테이프로 가렸으며 사진기를 손수건 밑으로 숨기기도 했다. 그는 실생활과 작품이 비슷한 과묵한 사람이었다. 사진작가로 40여 년간 지내오면서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으나 여행을 하는 데 강압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으므로 천천히 움직이며, 각 나라에서 '적절한 기간 동안 살고', 여유있게 시간을 사용하는 덕택에 그는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게 되었다.
1937년 라트나 모히니와 결혼했고, 자신이 만든 최초의 영화인 스페인 내란의 의료원조에 대한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그해는 그가 처음으로 신문과 잡지사를 위해 현장 보도사진들을 찍은 해이기도 하다. 영화에 대한 열정은 1936~39년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조수로 〈야유회 Une Partie de campagne〉·〈게임의 법칙 La Règle du jeu〉을 만들면서 더 충족시킬 수 있었다. 사진가로서 그는 소년시절에 본 위대한 영화들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가 말하기를 그것들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순간, 즉 인상적인 시점을 정확하게 선택하도록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정지된 낱장의 사진에 연속되는 영상의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그의 영화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중 1940년 독일의 포로가 되었다가 1943년 탈출하여, 이듬해 독일의 점령과 퇴각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프랑스 지하운동조직의 사진단에 참여했다. 1945년에는 미국 육군정보국을 위해 석방된 전쟁포로와 추방자들의 프랑스 귀환을 다룬 영화 〈귀향 Le Retour〉을 제작했다.
1933년 그의 사진들이 뉴욕 시의 권위 있는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전시되었으며, 194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을 때 비로소 그에 대한 비중있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미국의 사진가 로버트 카파등과 공동으로 매그넘포토스라고 알려진 협동 사진대행사를 창설했는데, 그 회사는 정기간행물업체에 당시 유능한 보도사진작가들이 찍은 전세계의 사진들을 제공했다. 매그넘포토스의 후원 아래 그는 어느 때보다도 보도사진에 열중했으며 이후 3년 동안 인도·중국·인도네시아·이집트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곳과 1950년대 유럽에서 모은 자료들이 1952~56년에 발간된 몇 권의 사진집의 주제를 이루었는데, 그 간행물들은 그가 자신의 특수기술에 정통한 대가라는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 그중 하나인 〈결정적 순간〉은 가장 잘 알려진 간행물로,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의 의미와 기술 및 효용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그의 중심적 사상인 포착하기 힘든 '결정적 순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눈부시게 명확한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에 피사체의 외양이 그 피사체가 포함되는 장면을 가장 효과적인 구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순간을 말한다. 그밖에 〈카르티에 브레송의 프랑스 Cartier-Bresson's France〉(1971)·〈아시아의 얼굴 The Face of Asia〉(1972)·〈러시아에 대하여 About Russia〉(1974)가 있다.
1955년 그는 프랑스 파리 장식미술박물관에서 400점의 사진으로 생애를 회고하는 개인전시회를 개최하는 큰 영예를 얻었고, 그 전시회는 유럽·미국·일본을 순회하며 열렸으며, 마지막에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그의 사진작품들이 보관되었다. 1963년에는 쿠바, 1963~64년에는 멕시코, 1965년에는 인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의 영화제작자인 루이 말이 회상하기를, 1968년 5월 파리 학생폭동 당시 카르티에 브레송은 35㎜ 사진기를 가지고 현장에서 그 격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불구하고 1시간당 4장 정도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관심을 영화제작으로 돌린 말년의 그는 〈캘리포니아 인상 Impressions of California〉(1969)·〈남부 촬영 Southern Exposures〉(1971)을 만들었다. 그는 스틸 사진과 화보잡지에서의 스틸 사진의 이용은 상당한 부분이 텔레비전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믿었다. 항상 자신의 사진을 자신이 직접 인화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사진을 기술적으로 다루는 것은 정신이 산만해져 해롭다고 믿어 영화 촬영을 감독할 때도 카메라를 직접 다루지 않았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라이카(그는 이것을 자신의 공책이라고 불렀음) 카메라를 가는 곳마다 휴대하고 다녔으며, 화가로서의 훈련을 위해 항상 작은 스케치북을 지니고 다녔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기에는 사회가 함축되어 존재했고 그의 마음속에서 사진은 점점 더 인조화되어가는 시대 속에 진실된 세계와 인간적인 세계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A. Scharf 글
reference
http://concise.britannica.com/
French photographer whose humane, spontaneous photographs helped establish photojournalism as an art form. His theory that photography can capture the meaning beneath outward appearance in instants of extraordinary clarity is perhaps best expressed in his book Images à la sauvette (1952; The Decisive Moment).
Cartier-Bresson was born and attended school in a village not far from Paris. In 1927–28 he studied in Paris with André Lhote, an artist and critic associated with the Cubist movement. Lhote implanted in him a lifelong interest in painting, a crucial factor in the education of his vision. In 1929 Cartier-Bresson went to the University of Cambridge, where he studied literature and painting.
As a boy, Cartier-Bresson had been initiated into the mysteries of the simple “Brownie” snapshot camera. But his first serious concern with the medium occurred about 1930, after seeing the work of two major 20th-century photographers, Eugène Atget and Man Ray. Making use of a small allowance, he traveled in Africa in 1931, where he lived in the bush, recording his experiences with a miniature camera. There he contracted blackwater fever, necessitating his return to France. The portability of a small camera and the ease with which one could record instantaneous impressions must have struck a sympathetic chord, for in 1933 he purchased his first 35-mm Leica. The use of this type of camera was particularly relevant to Cartier-Bresson. It lent itself not only to spontaneity but to anonymity as well. So much did Cartier-Bresson wish to remain a silent, and even unseen, witness, that he covered the bright chromium parts of his camera with black tape to render it less visible, and he sometimes hid the camera under a handkerchief. The man was similarly reticent about his life and work.
Hyères, France, gelatin silver print by Henri Cartier-Bresson, …Courtesy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All Rights Reserved, Julien Levy Collection, gift of Jean and Julien Levy, 1975.1134In more than 40 years as a photographer, Cartier-Bresson wandered continually around the world. But there was nothing compulsive about his travels, and he explicitly expressed a desire to move slowly, to “live on proper terms” in each country, to take his time, so that he became totally immersed in the environment.
In 1937 Cartier-Bresson produced a documentary film, his first, on medical aid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date also marked his first reportage photographs made for newspapers and magazines. His enthusiasm for filmmaking was further gratified when, from 1936 to 1939, he worked as an assistant to the film director Jean Renoir in the production of Une Partie de campagne (A Day in the Country) and La Règle du jeu (The Rules of the Game). As a photographer he felt indebted to the great films he saw as a youth. They taught him, he said, to choose precisely the expressive moment, the telling viewpoint. The importance he gave to sequential images in still photography may be attributed to his preoccupation with film.
In 1940, during World War II, Cartier-Bresson was taken prisoner by the Germans. He escaped in 1943 and the following year participated in a French underground photographic unit assigned to record the German occupation and retreat. In 1945 he made a film for the U.S. Office of War Information, Le Retour, which dealt with the return to France of released prisoners of war and deportees.
Though Cartier-Bresson's photographs had been exhibited in 1933 in the prestigious Julien Levy Gallery in New York City, a more important tribute was paid to him in 1947, when a one-man exhibition was held in that city's Museum of Modern Art. In that same year, Cartier-Bresson, in partnership with the U.S. photographer Robert Capa and others, founded the cooperative photo agency known as Magnum Photos. The organization offered periodicals global coverage by some of the most talented photojournalists of the time. Under the aegis of Magnum, Cartier-Bresson concentrated more than ever on reportage photography. The following three years found him in India, China, Indonesia, and Egypt. This material and more, taken in the 1950s in Europe, formed the subjects of several books published between 1952 and 1956. Such publications helped considerably to establish Cartier-Bresson's reputation as a master of his craft. One of them, and perhaps the best known, Images à la sauvette, contains what is probably Cartier-Bresson's most comprehensive and important statement on the meaning, technique, and utility of photography. The title refers to a central idea in his work—the decisive moment—the elusive instant when, with brilliant clarity, the appearance of the subject reveals in its essence the significance of the event of which it is a part, the most telling organization of forms. Later books include Cartier-Bresson's France (1971), The Face of Asia (1972), and About Russia (1974).
He was singularly honoured by his own country in 1955, when a retrospective exhibition of 400 of his photographs was held at the Museum of Decorative Arts in Paris and was then displayed in Europe, the United States, and Japan before the photographs were finally deposited in the Bibliothèque Nationale (National Library) in Paris. In 1963 he photographed in Cuba; in 1963–64, in Mexico; and in 1965, in India. The French filmmaker Louis Malle recalled that, during the student revolt in Paris in May 1968 Cartier-Bresson appeared with his 35-mm camera and, despite the explosive activities, took photographs at the rate of only about four per hour.
In the late 1960s Cartier-Bresson began to concentrate on making motion pictures—including Impressions of California (1969) and Southern Exposures (1971). He believed that still photography and its use in pictorial magazines was, to a large extent, being superseded by television. On principle, he always avoided developing his own prints, convinced that the technical exigencies of photography were a harmful distraction. Similarly, he directed the shooting of films and did not wield the camera himself. With this medium, however, he was no longer able to work unobtrusively by himself. Cartier-Bresson devoted his later years to drawing.
His Leica—his notebook, as he called it—accompanied him wherever he went, and, consistent with his training as a painter, he always carried a small sketch pad. There was for Cartier-Bresson a kind of social implication in the camera. To his mind, photography provided a means, in an increasingly synthetic epoch, for preserving the real and humane world.
Aaron Scharf
앙리 까르띠에-브레송
그의 인간적이며 자연스러운 사진들은 보도사진이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숨어 있는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라는 그의 이론은 저서인 〈결정적 순간 Images à la sauvette〉(1952)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파리 근교에서 태어나 그곳 학교에 다녔으며, 1927~28년 파리에서 입체파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예술가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로트와 공부했다. 로트는 카르티에가 회화에 대해 평생의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인물이었는데 사물을 보는 훈련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29년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문학과 회화를 공부했다.
소년시절 간단한 브라우니, 스냅샷 카메라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그 매체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1930년경 20세기의 두 중요한 사진작가인 외젠 아제와 맨 레이의 작품을 보고 나서였다. 그는 얼마간의 비용을 마련해 1931년 아프리카의 오지에 살면서 소형(35㎜)사진기로 자신이 겪은 것들을 기록했으며, 흑수열병에 걸려 불가피하게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소형사진기의 휴대성과 즉각적인 인상을 쉽게 기록할 수 있는 편리성에 공감하게 된 그는 1933년 35㎜ '라이카' 사진기를 샀다. 이런 종류의 사진기는 그에게 특히 잘 맞았는데 자연스러움뿐만 아니라 익명의 상태로 촬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소리내지 않고 심지어는 보이지도 않고, 남의 눈에 띄는 것을 몹시 꺼려했기 때문에 사진기 렌즈의 밝은 크롬 부분을 검정 테이프로 가렸으며 사진기를 손수건 밑으로 숨기기도 했다. 그는 실생활과 작품이 비슷한 과묵한 사람이었다. 사진작가로 40여 년간 지내오면서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으나 여행을 하는 데 강압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으므로 천천히 움직이며, 각 나라에서 '적절한 기간 동안 살고', 여유있게 시간을 사용하는 덕택에 그는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게 되었다.
1937년 라트나 모히니와 결혼했고, 자신이 만든 최초의 영화인 스페인 내란의 의료원조에 대한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그해는 그가 처음으로 신문과 잡지사를 위해 현장 보도사진들을 찍은 해이기도 하다. 영화에 대한 열정은 1936~39년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조수로 〈야유회 Une Partie de campagne〉·〈게임의 법칙 La Règle du jeu〉을 만들면서 더 충족시킬 수 있었다. 사진가로서 그는 소년시절에 본 위대한 영화들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가 말하기를 그것들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순간, 즉 인상적인 시점을 정확하게 선택하도록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정지된 낱장의 사진에 연속되는 영상의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그의 영화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중 1940년 독일의 포로가 되었다가 1943년 탈출하여, 이듬해 독일의 점령과 퇴각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프랑스 지하운동조직의 사진단에 참여했다. 1945년에는 미국 육군정보국을 위해 석방된 전쟁포로와 추방자들의 프랑스 귀환을 다룬 영화 〈귀향 Le Retour〉을 제작했다.
1933년 그의 사진들이 뉴욕 시의 권위 있는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전시되었으며, 194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을 때 비로소 그에 대한 비중있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미국의 사진가 로버트 카파등과 공동으로 매그넘포토스라고 알려진 협동 사진대행사를 창설했는데, 그 회사는 정기간행물업체에 당시 유능한 보도사진작가들이 찍은 전세계의 사진들을 제공했다. 매그넘포토스의 후원 아래 그는 어느 때보다도 보도사진에 열중했으며 이후 3년 동안 인도·중국·인도네시아·이집트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곳과 1950년대 유럽에서 모은 자료들이 1952~56년에 발간된 몇 권의 사진집의 주제를 이루었는데, 그 간행물들은 그가 자신의 특수기술에 정통한 대가라는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 그중 하나인 〈결정적 순간〉은 가장 잘 알려진 간행물로,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의 의미와 기술 및 효용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그의 중심적 사상인 포착하기 힘든 '결정적 순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눈부시게 명확한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에 피사체의 외양이 그 피사체가 포함되는 장면을 가장 효과적인 구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순간을 말한다. 그밖에 〈카르티에 브레송의 프랑스 Cartier-Bresson's France〉(1971)·〈아시아의 얼굴 The Face of Asia〉(1972)·〈러시아에 대하여 About Russia〉(1974)가 있다.
1955년 그는 프랑스 파리 장식미술박물관에서 400점의 사진으로 생애를 회고하는 개인전시회를 개최하는 큰 영예를 얻었고, 그 전시회는 유럽·미국·일본을 순회하며 열렸으며, 마지막에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그의 사진작품들이 보관되었다. 1963년에는 쿠바, 1963~64년에는 멕시코, 1965년에는 인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의 영화제작자인 루이 말이 회상하기를, 1968년 5월 파리 학생폭동 당시 카르티에 브레송은 35㎜ 사진기를 가지고 현장에서 그 격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불구하고 1시간당 4장 정도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관심을 영화제작으로 돌린 말년의 그는 〈캘리포니아 인상 Impressions of California〉(1969)·〈남부 촬영 Southern Exposures〉(1971)을 만들었다. 그는 스틸 사진과 화보잡지에서의 스틸 사진의 이용은 상당한 부분이 텔레비전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믿었다. 항상 자신의 사진을 자신이 직접 인화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사진을 기술적으로 다루는 것은 정신이 산만해져 해롭다고 믿어 영화 촬영을 감독할 때도 카메라를 직접 다루지 않았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라이카(그는 이것을 자신의 공책이라고 불렀음) 카메라를 가는 곳마다 휴대하고 다녔으며, 화가로서의 훈련을 위해 항상 작은 스케치북을 지니고 다녔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기에는 사회가 함축되어 존재했고 그의 마음속에서 사진은 점점 더 인조화되어가는 시대 속에 진실된 세계와 인간적인 세계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A. Scharf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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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ncise.britannica.com/
금요일, 5월 11, 2007
リナックスで行こう♪
우분투7.04에 3D데스크탑 BERYL을 설정해본 스크린샷. 모든 스크린샷은 클릭하면 원래크기로 볼 수 있다.(스크린샷 일부가 조금씩 깨져있는데 실제로는 깨지지 않는다. 캡쳐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는듯)
거져줘도 데스크탑에는 안쓴다는 리눅스에서 이상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델에서 윈도우 대신 리눅스(우분투)를 설치한 PC를 발매한다는 소식도 있는데 데스크탑 리눅스의 핵심에는 라이브CD와 3D데스크탑이 있는것 같다.
라이브CD는 HDD가 필요없이 CD에서 OS를 부팅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리눅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인스톨도 필요없으니 게임기를 켜보는 기분이랄까. 이것저것 4~5종의 라이브CD리눅스를 재미삼아 실행해봤었는데 결국 우분투를 하드에 인스톨해버리고야 말았다. 여지껏 사용해본 MS의 OS에서는 구경도 못해본 3D데스크탑의 아름다움과 설정의 자유도, 콘솔창이 필요없어 초보에게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synaptic팩키지관리등 매력이 상당히 많다.
기본으로 FIREFOX, GAIM, OPEN OFFICE, GIMP등의 어플리케이션이 설치되므로 안되는것도 별로 없는것 같다. 문제는 안정성인데 베릴의 설정을 건드리다보면 윈도우가 죽는다던지, 설정이 제대로 반영이 안된다던지, 여러가지 문제가 일어나는데 불안정성에 있어서는 윈도우95를 능가한다. 약 일주일간 5번 이상 재설치를 한것같다. 설정을 변경하지 않으면 셧다운을 시켜도 PC가 꺼지지 않는다거나, 하이버네이션은 어떻게 해봐도 쓸 수 없다거나 하는 문제들도 자주보인다.
몇년전에는 설치조차도 쉽게 안되던것을 생각하면 큰 발전을 이뤄왔다고 봐야할까, 아니면 7년 이상 전의 OS인 윈도우 2000수준의 안정성과 편의성도 제공하지 못하므로 그냥 없는 셈 치는게 나을까.
분명한건 고사양을 요구하지 않는 아름다운 3D데스크탑은 MS에서 제공한적이 없고, 정말로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필수 어플레케이션들은 다 들어있고 이것들이 이제껏 본적이 없는 아름다운 화면위에서 돌아간다. 그것도 공짜로! Berry Linux는 CD로 기동해도 3D데스크탑을 사용 가능하므로 관심이 있다면 한번 사용해 보기를 권장한다.
거져줘도 데스크탑에는 안쓴다는 리눅스에서 이상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델에서 윈도우 대신 리눅스(우분투)를 설치한 PC를 발매한다는 소식도 있는데 데스크탑 리눅스의 핵심에는 라이브CD와 3D데스크탑이 있는것 같다.
라이브CD는 HDD가 필요없이 CD에서 OS를 부팅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리눅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인스톨도 필요없으니 게임기를 켜보는 기분이랄까. 이것저것 4~5종의 라이브CD리눅스를 재미삼아 실행해봤었는데 결국 우분투를 하드에 인스톨해버리고야 말았다. 여지껏 사용해본 MS의 OS에서는 구경도 못해본 3D데스크탑의 아름다움과 설정의 자유도, 콘솔창이 필요없어 초보에게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synaptic팩키지관리등 매력이 상당히 많다.
기본으로 FIREFOX, GAIM, OPEN OFFICE, GIMP등의 어플리케이션이 설치되므로 안되는것도 별로 없는것 같다. 문제는 안정성인데 베릴의 설정을 건드리다보면 윈도우가 죽는다던지, 설정이 제대로 반영이 안된다던지, 여러가지 문제가 일어나는데 불안정성에 있어서는 윈도우95를 능가한다. 약 일주일간 5번 이상 재설치를 한것같다. 설정을 변경하지 않으면 셧다운을 시켜도 PC가 꺼지지 않는다거나, 하이버네이션은 어떻게 해봐도 쓸 수 없다거나 하는 문제들도 자주보인다.
몇년전에는 설치조차도 쉽게 안되던것을 생각하면 큰 발전을 이뤄왔다고 봐야할까, 아니면 7년 이상 전의 OS인 윈도우 2000수준의 안정성과 편의성도 제공하지 못하므로 그냥 없는 셈 치는게 나을까.
분명한건 고사양을 요구하지 않는 아름다운 3D데스크탑은 MS에서 제공한적이 없고, 정말로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필수 어플레케이션들은 다 들어있고 이것들이 이제껏 본적이 없는 아름다운 화면위에서 돌아간다. 그것도 공짜로! Berry Linux는 CD로 기동해도 3D데스크탑을 사용 가능하므로 관심이 있다면 한번 사용해 보기를 권장한다.
일요일, 4월 29, 2007
월요일, 4월 09, 2007
화요일, 3월 27, 2007
LTI system theory
linear, time-invariant system
옴의 법칙(Ohm's law)
V=IR
저항에 전류가 흐르면 가해진 압력과 비례한다.
중첩의 원리(Superposition)
한 회로망에 여러 개의 전원이 동시에 존재할 때 어떤 해석 대상 소자에 미친 전기량(전류 또는 전압)의 합으로 정의 된다. 이 때 하나의 전원이 해석 대상 소자에 미친 전기량을 계산하게 되므로 사용하지 않는 전원이 전류원인 경우에는 개방, 전압원인 경우에는 단락시킨다.
RMS : Root mean square
Effective value
실효치(RMS) : 교류 신호가 어떤 부하에 흐를 때 직류 신호가 한 일의 양으로 계산된 값
요즘 생활의 핵심 키워드.. 라플라스, 푸리에, 선형 시스템(Linear system), 중첩의 원리(Superposition), 동질성의 원리(Homogeneity)
요즘, 전자 공학도답게 맨날 수학이랑 씨름하며 점점 이진수 인간이 되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
당분간 포스팅에 있어 글 자체에 좀 더 충실해져 보려한다.
각종 이미지, 동영상 등을 이용한 포스팅도 좋지만 그렇게만 하면 자칫 글은 얼마 없는 포스팅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포스팅에 글이 적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성도 있으니까
요즘 생활에 충실한 것 그리고 시간을 잘 쪼개서 쓰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돈이 아무리 많아도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란 결국 시간이란 것에 속박되어 버리므로 어쩌면 사람은 주어진 시간 앞에 대략(수명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평등하다고 볼 수 있겠다.
옴의 법칙(Ohm's law)
V=IR
저항에 전류가 흐르면 가해진 압력과 비례한다.
중첩의 원리(Superposition)
한 회로망에 여러 개의 전원이 동시에 존재할 때 어떤 해석 대상 소자에 미친 전기량(전류 또는 전압)의 합으로 정의 된다. 이 때 하나의 전원이 해석 대상 소자에 미친 전기량을 계산하게 되므로 사용하지 않는 전원이 전류원인 경우에는 개방, 전압원인 경우에는 단락시킨다.
RMS : Root mean square
Effective value
실효치(RMS) : 교류 신호가 어떤 부하에 흐를 때 직류 신호가 한 일의 양으로 계산된 값
요즘 생활의 핵심 키워드.. 라플라스, 푸리에, 선형 시스템(Linear system), 중첩의 원리(Superposition), 동질성의 원리(Homogeneity)
요즘, 전자 공학도답게 맨날 수학이랑 씨름하며 점점 이진수 인간이 되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
당분간 포스팅에 있어 글 자체에 좀 더 충실해져 보려한다.
각종 이미지, 동영상 등을 이용한 포스팅도 좋지만 그렇게만 하면 자칫 글은 얼마 없는 포스팅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포스팅에 글이 적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성도 있으니까
요즘 생활에 충실한 것 그리고 시간을 잘 쪼개서 쓰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돈이 아무리 많아도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란 결국 시간이란 것에 속박되어 버리므로 어쩌면 사람은 주어진 시간 앞에 대략(수명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평등하다고 볼 수 있겠다.
토요일, 3월 24, 2007
맥주 야그
나는 맥주를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소주는 굉장히 싫어한다.
일단 몇 번을 먹어봐도 정말 맛이 없다.
에틸알코올에 물 타먹는 맛이다.
소주를 즐기는 것과 인생의 맛을 아네 어쩌네 연관시키는 자들은 그냥 마음이 나약한 자들로 보인다.
원래 소주는 기원전 3000년경 서아시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런 소주를 대한민국 전통주처럼 여기는 것 또한 거북하다.
그러나 맥주 역시 과음하면 생기는 숙취는 정말 싫다.
전에 독일 브로이 하우스에서 맥주를 마신 건 잘한 짓 인지 모르겠다. 20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 그만큼 흥분된 분위기와 직원들의 맥주 나르는 묘기(?)는 둘째 치고 그 곳 맥주의 풍부하고 깊은 맛과 매우 적은 거품 그리고 알코올이 느껴지지 않으면서 우리나라 맥주보다 높은 도수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훈제 닭요리 안주랑 토할 때까지 마시고 다음날 머리 아파 죽는 줄 알았다. 그로부터 5년이나 지났는데도 다시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절실해진다. 슈퍼에서 파는 맥주와 비교하자면 고등어와 참치랄까?
그때 스페인 사람들이 말을 걸어 잠시 어울리면서 그 사람들 참 밝고 명랑한 성격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어제 '카스' 신제품 '레드'를 도수가 높다하여 기대하며 먹어봤는데 일반 맥주에 소주 탄 맛이다..ㅡ_ㅡ;
하지만 소주는 굉장히 싫어한다.
일단 몇 번을 먹어봐도 정말 맛이 없다.
에틸알코올에 물 타먹는 맛이다.
소주를 즐기는 것과 인생의 맛을 아네 어쩌네 연관시키는 자들은 그냥 마음이 나약한 자들로 보인다.
원래 소주는 기원전 3000년경 서아시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런 소주를 대한민국 전통주처럼 여기는 것 또한 거북하다.
그러나 맥주 역시 과음하면 생기는 숙취는 정말 싫다.
전에 독일 브로이 하우스에서 맥주를 마신 건 잘한 짓 인지 모르겠다. 20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 그만큼 흥분된 분위기와 직원들의 맥주 나르는 묘기(?)는 둘째 치고 그 곳 맥주의 풍부하고 깊은 맛과 매우 적은 거품 그리고 알코올이 느껴지지 않으면서 우리나라 맥주보다 높은 도수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훈제 닭요리 안주랑 토할 때까지 마시고 다음날 머리 아파 죽는 줄 알았다. 그로부터 5년이나 지났는데도 다시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절실해진다. 슈퍼에서 파는 맥주와 비교하자면 고등어와 참치랄까?
그때 스페인 사람들이 말을 걸어 잠시 어울리면서 그 사람들 참 밝고 명랑한 성격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어제 '카스' 신제품 '레드'를 도수가 높다하여 기대하며 먹어봤는데 일반 맥주에 소주 탄 맛이다..ㅡ_ㅡ;
토요일, 3월 10, 2007
목요일, 3월 01, 2007
우케미 정리
일본어강사인 이치카와 야스코씨의 강좌중 우케미부분을 한국어로 번역해봤습니다. 국내에서 가르치는 스타일과 다르게 우케미를 직접과 간접용법 두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매우 명쾌한 분류법이라 생각됩니다.
보다 많은 내용 http://homepage3.nifty.com/i-yasu/
●受身表現(受動態)우케미표현(수동태)
「ホセがカルメンを殺す」のような能動文と、「カルメンがホセに殺される」のような受身文はどう違うのでしょうか。
"호세가 카르멘을 죽인다"와 같은 능동문과 "카르멘이 호세에게 죽는다"와 같은 수동문은 어떻게 다를까요?
私達が物事について述べるとき、行為者の側から「誰が何をした」と述べる場合と、視点を行為を受けたほうに移し、被行為者(被害者)の側から述べる場合があります。
우리들이 여러가지 일에 대해서 말할때 행위자측에서 "누가 무엇을 했다"라고 얘기하는 경우와, 시점을 행위를 당한쪽으로 이동시켜 피행위자(피해자)의 측에서 얘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受身表現は後者の、被行為者(被害者)の側に視点を置いて述べる文法形式です。
수동표현은 후자의 피행위자(피해자) 쪽에 시점을 두고 얘기하는 문법형식입니다.
日本語の受身(受動態)は大きく、直接受身と間接受身に分けられます。直接受身というのは、「ホセがカルメンを殺す」から「カルメンがホセに殺される」が表現できるように、主語(カルメン)が誰か(ホセ)によって直接的な動作・行為を受ける受身のことを言います。
일 본어의 수동은 크게 직접수동(直接受身)과 간접수동(間接受身)으로 나눠집니다. 직접수동이라는 것은 "호세가 카르멘을 죽인다"에서 "카르멘이 호세에게 죽다"로 표현할수 있도록 주어(카르멘)가 누군가(호세)에 의해 직접적으로 동작과 행동을 당하는 수동을 말합니다.
一方、間接受身は「子供が私のパソコンをこわす」から「私は子供にパソコンをこわされる」が表現できるように、主語(私) が誰か(子供)によって、直接的な動作・行為を受けたのではないが、パソコンをこわされることによって、間接的に何らかの影響(多くの場合被害)を受ける ことを表す受身です。
한편 간접수동은 "애기가 나의 PC를 망가뜨리다"에서 "나는 애기에 의해 PC가 망가져버렸다"(역주-이건 한국어로 직역 불가)처럼 주어(나)가 누군가(애기)에 의해 직접적인 동작이나 행위를 당한것은 아니지만, PC가 부숴져버린것에 의해 간접적인 무엇인가의 영향(대체로 피해)을 입은것을 나타내는 수동입니다.
●直接受身 직접수동
直接受身では、用いられる動詞は他動詞で、(1)(2)のように、動作を行う人・ものは「に」で表されます。
직접수동에서 쓰이는 동사는 타동사로 (1)(2)처럼 동작을 행하는 사람, 물건은 조사 「に」를 씁니다.
(1)兄が弟を殴った。형이 동생을 때리다
↓
弟が兄に殴られた。동생이 형에게 맞다
(2)夫は彼女を深く愛していた。남편은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있었다
↓
彼女は夫に深く愛されていた。그녀는 남편에게 깊이 사랑받고 있었다
行う動作が「書く・作る・建てる・発明する・設計する」などのように、何かを創造することを表す動詞では、多くの場合次のように「によって」が用いられます。
행하는 동작이 「書く・作る・建てる・発明する・設計する」처럼 뭔가 창조하는것을 나타내는 동사에서는 많은경우 다음경우처럼 「によって」가 쓰입니다.
(3)有名な建築家がこのビルを建てた。유명한 건축가가 이 빌딩을 세웠다
↓
このビルは有名な建築家によって建てられた。이 빌딩은 유명한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다
また、(4)のように原料などは「から」が用いられる。
또한 (4)처럼 원료등은 「から」가 쓰입니다.
(4)ワインはぶどうから作られる。와인은 포도에서(로) 만들어진다
また、特に動作を行う人・ものを表す必要がない場合(行為者のない受身文)は、「~に/によって」が省略されます。
또한 특별히 동작을 행하는 사람이나 사물의 표시가 필요없는 경우(행위자가 없는 수동)은 「~に/によって」가 생략됩니다.
(5)輸入品には高い関税がかけられている。수입품에는 비싼 관세가 물려진다
(6)この日本家屋は100年前に建てられたものだ。이 일본가옥은 100년전에 지어진것이다
(7)彼の表情から疲労の色が感じられた。그의 표정에서 피로한 색이 느껴진다
●間接受身 간접수동
間接受身というのは英語などにはない受身で、主語が、ある事態・事件で迷惑をこうむったという含みを持ちます。そのため迷惑受身とも呼ばれることが多いです。
간접수동이라는 것은 영어에는 없는것으로 주어가 어느 사태, 사건에 피해를 입은경우가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迷惑受身(멋대로 번역-피해수동)이라고도 부릅니다
用いられる動詞は他動詞と自動詞の両方で、迷惑をこうむるもの(主語)は話し手であることが多いです。文の形としては、(5)(6)のように、「(主語)が/は(誰か)に(主語の所有物など)を~(さ)れる」という形をとります。
사 용되는 동사는 타동사와 자동사 양쪽으로 피해를 받는것(주어)는 말하는 쪽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문 (5)(6)처럼 「(主語)が/は(誰か)に(主語の所有物など)を~(さ)れる」(주어)가/는 (누군가)에게 (주어의 소유물을) 뭐뭐 되버리다
(5)子供が私のカメラをこわした。애가 내 카메라를 부쉈다
↓
私は子供にカメラをこわされた。나는 애에게 카메라를??? (한국어로 직역불가)
(6)電車の中で誰かが私の足を踏んだ。전철안에서 누군가 내 발을 밟았다
↓
私は電車の中で足を踏まれた。나는 전철안에서 발을 밟혔다
(5)(6)では動詞が「こわす」「踏む」のように他動詞が用いられていますが、(7)のように自動詞で受身表現がなされる場合もあります。
(5)(6)에서 동사가 부수다, 밟다처럼 타동사가 쓰이지만 (7)처럼 자동사가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7)私の子供が一晩中泣いた。내 애가 밤중에 울었다
↓
私は一晩中子供に泣かれて、困った。나는 밤중에 애에게 ???(한국어 직역 불가), 고생했다
(7)のような間接受身は日本語独特だと思われますが、特に最近は実際にはあまり使われていないという報告もあります。
(7)처럼 간접수동은 일본어에만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실제회화에서는 많이 쓰이지 않는듯 합니다.
外国人学習者には、間接受身の概念が理解しにくいようです。学習者だけではなく、日本人ネイティブである私自身も日本語教師1年生のとき、間接受身という ものがよくわかっていないようでした。次の(8)を(8)'のように訳して、外国人学習者が笑っている意味がよくわからなかったという経験があります。
외 국인 학습자에게는 간접수동의 이해가 어려운듯 합니다. 학습자 뿐 아니라 일본인 네이티브인 본인조차 일본어교사 1년차때는 간접수동이라는 것이 잘 이해가 안갔었습니다. 다음의 (8)을 (8)'처럼 바꿔 외국인 학습자가 웃는 경우 잘 이해가 안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8) 私は弟にケーキを食べられた。나는 동생에게 케익을 먹혀버렸다
(8)' I was eaten cakes by my younger brother.
これでは「私」が「弟」に食べられてしまうことになりますね。
이렇게 바꿔버리면 내가 동생에게 먹혀버린것으로 되는군요
また、外国人学習者は、迷惑を受ける人を主題として文頭に出すということがなかなかわからず、(9)(10)のような文を作ってしまいがちです。
또한 외국인 학습자는 피해를 입는사람을 주제로 문장을 만드는것을 어려워하므로 (9)(10)같은 문장을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흔합니다.
(9) 私のカメラは弟にこわされた。
(10) 私の靴が女の人の靴に踏まれました。
正解はそれぞれ、「 私は弟にカメラをこわされた。」「私は女の人に靴を踏まれました。」となります。
정답은 각각 「 私は弟にカメラをこわされた。」「私は女の人に靴を踏まれました。」가 됩니다.
(7)で紹介した自動詞の受身を学習者に教える必要があるのかないのかについては、議論のあるところです。日本人でも「一晩中子供が泣いて、困った。」と言うことが多いかもしれません。
(7)에서 소개한 자동사의 수동을 학습자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말이 맣습니다. 일본인이라도 「一晩中子供が泣いて、困った。」라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次の(11)(12)でも「販売員が来て困った」「雨が降って、ずぶ濡れになった」と言うことが多いと思われます。
다음의 (11)(12)에서도 「販売員が来て困った」판매원이 와서 곤란해졌다「雨が降って、ずぶ濡れになった」비가와서 젖어버렸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11) きのうは、しつこい訪問販売員に来られて困った。어제는 끈질긴 방문판매원에게 옮을 당해? 곤란했다
(12) 雨に降られて、ずぶ濡れになってしまった。비가 오는것을 당해? 젖어버렸다
将来、自動詞の受身を取り上げない教科書も出てきてくるかもしれません。仮に授業で取り上げる必要があっても、理解することに重点を置いて指導するのもひとつの考え方だと思われます。
앞으로는 자동사의 수동부분이 없는 교과서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수업에서 가르칠 경우라도 이해할수있도록 가르치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最後に受身形の活用を示しておきます。
마지막으로 수동의 활용
Ⅰグループ動詞(5단동사)
書く 書かれる
飲む 飲まれる
呼ぶ 呼ばれる
とる とられる
使う 使われる
話す 話される
Ⅱグループ動詞(상1단, 하1단동사)
食べる 食べられる
見る 見られる
Ⅲグループ動詞(か변격, さ변격동사)
くる こられる
する される
보다 많은 내용 http://homepage3.nifty.com/i-yasu/
●受身表現(受動態)우케미표현(수동태)
「ホセがカルメンを殺す」のような能動文と、「カルメンがホセに殺される」のような受身文はどう違うのでしょうか。
"호세가 카르멘을 죽인다"와 같은 능동문과 "카르멘이 호세에게 죽는다"와 같은 수동문은 어떻게 다를까요?
私達が物事について述べるとき、行為者の側から「誰が何をした」と述べる場合と、視点を行為を受けたほうに移し、被行為者(被害者)の側から述べる場合があります。
우리들이 여러가지 일에 대해서 말할때 행위자측에서 "누가 무엇을 했다"라고 얘기하는 경우와, 시점을 행위를 당한쪽으로 이동시켜 피행위자(피해자)의 측에서 얘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受身表現は後者の、被行為者(被害者)の側に視点を置いて述べる文法形式です。
수동표현은 후자의 피행위자(피해자) 쪽에 시점을 두고 얘기하는 문법형식입니다.
日本語の受身(受動態)は大きく、直接受身と間接受身に分けられます。直接受身というのは、「ホセがカルメンを殺す」から「カルメンがホセに殺される」が表現できるように、主語(カルメン)が誰か(ホセ)によって直接的な動作・行為を受ける受身のことを言います。
일 본어의 수동은 크게 직접수동(直接受身)과 간접수동(間接受身)으로 나눠집니다. 직접수동이라는 것은 "호세가 카르멘을 죽인다"에서 "카르멘이 호세에게 죽다"로 표현할수 있도록 주어(카르멘)가 누군가(호세)에 의해 직접적으로 동작과 행동을 당하는 수동을 말합니다.
一方、間接受身は「子供が私のパソコンをこわす」から「私は子供にパソコンをこわされる」が表現できるように、主語(私) が誰か(子供)によって、直接的な動作・行為を受けたのではないが、パソコンをこわされることによって、間接的に何らかの影響(多くの場合被害)を受ける ことを表す受身です。
한편 간접수동은 "애기가 나의 PC를 망가뜨리다"에서 "나는 애기에 의해 PC가 망가져버렸다"(역주-이건 한국어로 직역 불가)처럼 주어(나)가 누군가(애기)에 의해 직접적인 동작이나 행위를 당한것은 아니지만, PC가 부숴져버린것에 의해 간접적인 무엇인가의 영향(대체로 피해)을 입은것을 나타내는 수동입니다.
●直接受身 직접수동
直接受身では、用いられる動詞は他動詞で、(1)(2)のように、動作を行う人・ものは「に」で表されます。
직접수동에서 쓰이는 동사는 타동사로 (1)(2)처럼 동작을 행하는 사람, 물건은 조사 「に」를 씁니다.
(1)兄が弟を殴った。형이 동생을 때리다
↓
弟が兄に殴られた。동생이 형에게 맞다
(2)夫は彼女を深く愛していた。남편은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있었다
↓
彼女は夫に深く愛されていた。그녀는 남편에게 깊이 사랑받고 있었다
行う動作が「書く・作る・建てる・発明する・設計する」などのように、何かを創造することを表す動詞では、多くの場合次のように「によって」が用いられます。
행하는 동작이 「書く・作る・建てる・発明する・設計する」처럼 뭔가 창조하는것을 나타내는 동사에서는 많은경우 다음경우처럼 「によって」가 쓰입니다.
(3)有名な建築家がこのビルを建てた。유명한 건축가가 이 빌딩을 세웠다
↓
このビルは有名な建築家によって建てられた。이 빌딩은 유명한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다
また、(4)のように原料などは「から」が用いられる。
또한 (4)처럼 원료등은 「から」가 쓰입니다.
(4)ワインはぶどうから作られる。와인은 포도에서(로) 만들어진다
また、特に動作を行う人・ものを表す必要がない場合(行為者のない受身文)は、「~に/によって」が省略されます。
또한 특별히 동작을 행하는 사람이나 사물의 표시가 필요없는 경우(행위자가 없는 수동)은 「~に/によって」가 생략됩니다.
(5)輸入品には高い関税がかけられている。수입품에는 비싼 관세가 물려진다
(6)この日本家屋は100年前に建てられたものだ。이 일본가옥은 100년전에 지어진것이다
(7)彼の表情から疲労の色が感じられた。그의 표정에서 피로한 색이 느껴진다
●間接受身 간접수동
間接受身というのは英語などにはない受身で、主語が、ある事態・事件で迷惑をこうむったという含みを持ちます。そのため迷惑受身とも呼ばれることが多いです。
간접수동이라는 것은 영어에는 없는것으로 주어가 어느 사태, 사건에 피해를 입은경우가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迷惑受身(멋대로 번역-피해수동)이라고도 부릅니다
用いられる動詞は他動詞と自動詞の両方で、迷惑をこうむるもの(主語)は話し手であることが多いです。文の形としては、(5)(6)のように、「(主語)が/は(誰か)に(主語の所有物など)を~(さ)れる」という形をとります。
사 용되는 동사는 타동사와 자동사 양쪽으로 피해를 받는것(주어)는 말하는 쪽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문 (5)(6)처럼 「(主語)が/は(誰か)に(主語の所有物など)を~(さ)れる」(주어)가/는 (누군가)에게 (주어의 소유물을) 뭐뭐 되버리다
(5)子供が私のカメラをこわした。애가 내 카메라를 부쉈다
↓
私は子供にカメラをこわされた。나는 애에게 카메라를??? (한국어로 직역불가)
(6)電車の中で誰かが私の足を踏んだ。전철안에서 누군가 내 발을 밟았다
↓
私は電車の中で足を踏まれた。나는 전철안에서 발을 밟혔다
(5)(6)では動詞が「こわす」「踏む」のように他動詞が用いられていますが、(7)のように自動詞で受身表現がなされる場合もあります。
(5)(6)에서 동사가 부수다, 밟다처럼 타동사가 쓰이지만 (7)처럼 자동사가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7)私の子供が一晩中泣いた。내 애가 밤중에 울었다
↓
私は一晩中子供に泣かれて、困った。나는 밤중에 애에게 ???(한국어 직역 불가), 고생했다
(7)のような間接受身は日本語独特だと思われますが、特に最近は実際にはあまり使われていないという報告もあります。
(7)처럼 간접수동은 일본어에만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실제회화에서는 많이 쓰이지 않는듯 합니다.
外国人学習者には、間接受身の概念が理解しにくいようです。学習者だけではなく、日本人ネイティブである私自身も日本語教師1年生のとき、間接受身という ものがよくわかっていないようでした。次の(8)を(8)'のように訳して、外国人学習者が笑っている意味がよくわからなかったという経験があります。
외 국인 학습자에게는 간접수동의 이해가 어려운듯 합니다. 학습자 뿐 아니라 일본인 네이티브인 본인조차 일본어교사 1년차때는 간접수동이라는 것이 잘 이해가 안갔었습니다. 다음의 (8)을 (8)'처럼 바꿔 외국인 학습자가 웃는 경우 잘 이해가 안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8) 私は弟にケーキを食べられた。나는 동생에게 케익을 먹혀버렸다
(8)' I was eaten cakes by my younger brother.
これでは「私」が「弟」に食べられてしまうことになりますね。
이렇게 바꿔버리면 내가 동생에게 먹혀버린것으로 되는군요
また、外国人学習者は、迷惑を受ける人を主題として文頭に出すということがなかなかわからず、(9)(10)のような文を作ってしまいがちです。
또한 외국인 학습자는 피해를 입는사람을 주제로 문장을 만드는것을 어려워하므로 (9)(10)같은 문장을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흔합니다.
(9) 私のカメラは弟にこわされた。
(10) 私の靴が女の人の靴に踏まれました。
正解はそれぞれ、「 私は弟にカメラをこわされた。」「私は女の人に靴を踏まれました。」となります。
정답은 각각 「 私は弟にカメラをこわされた。」「私は女の人に靴を踏まれました。」가 됩니다.
(7)で紹介した自動詞の受身を学習者に教える必要があるのかないのかについては、議論のあるところです。日本人でも「一晩中子供が泣いて、困った。」と言うことが多いかもしれません。
(7)에서 소개한 자동사의 수동을 학습자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말이 맣습니다. 일본인이라도 「一晩中子供が泣いて、困った。」라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次の(11)(12)でも「販売員が来て困った」「雨が降って、ずぶ濡れになった」と言うことが多いと思われます。
다음의 (11)(12)에서도 「販売員が来て困った」판매원이 와서 곤란해졌다「雨が降って、ずぶ濡れになった」비가와서 젖어버렸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11) きのうは、しつこい訪問販売員に来られて困った。어제는 끈질긴 방문판매원에게 옮을 당해? 곤란했다
(12) 雨に降られて、ずぶ濡れになってしまった。비가 오는것을 당해? 젖어버렸다
将来、自動詞の受身を取り上げない教科書も出てきてくるかもしれません。仮に授業で取り上げる必要があっても、理解することに重点を置いて指導するのもひとつの考え方だと思われます。
앞으로는 자동사의 수동부분이 없는 교과서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수업에서 가르칠 경우라도 이해할수있도록 가르치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最後に受身形の活用を示しておきます。
마지막으로 수동의 활용
Ⅰグループ動詞(5단동사)
書く 書かれる
飲む 飲まれる
呼ぶ 呼ばれる
とる とられる
使う 使われる
話す 話される
Ⅱグループ動詞(상1단, 하1단동사)
食べる 食べられる
見る 見られる
Ⅲグループ動詞(か변격, さ변격동사)
くる こられる
する される
금요일, 2월 23, 2007
발음의 중요성(2)
이해하기 쉬운 음성:어문학사(よくわかる音声:アルク)의 5장 1과를 요약 인용하고, 나 개인의 생각도 첨가해 정리해본다. 일본어뿐 아니라 어느 언어라도 다 해당되는 얘기라 생각한다.
왜 음성학은 등한시 되는가?
"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알 수 없다 ", "무엇을 어디까지 가르치면 좋을지 알 수 없다", "적당한 교재교구가 없다", 바로 이것이 강사측의 입장이자 진실이다. 더우기 「月」-「好き」「角」-「カード」「桃」-「腿」등 단음, 특수박, 악센트의 미니멀페어(단어의 최소대. 비교발음 훈련에 자주 사용된다)수업에 관해서도 "미니멀페어의 수업은 단조롭고 학습자가 지루해 하므로 가르치고 싶지 않다", "미니멀페어수업은 학습자가 긴장하므로 하지 않는 편이 좋다"라는 얘기도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학습자가 싫어하니까 한자수업은 하지 않는다, 문법도 가르치지 않는다"라고 할 사람은 없을것이다. 오히려 강사의 입장에서는 지루하거나 긴장하지 않도록 나름의 수업방식을 연구해 학습의욕을 높이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잘못된 발음은 의도하지 않은 "내용"까지 전달해 버린다
1. 만약 松田(matsuda)를 찾는데 つ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해 일본인이 듣기에 masuda로 들린다면 松田가 아닌 増田를 찾는것으로 오인 될 것이다.
2. 만약 笠井(kasai)를 찾는데 첫박의 /ka/를 유기음 ㅋ(/kha/) 으로 발음한다면 일본인이 듣기에는 화가나서 찾고있는듯한 인상을 준다
3. 일본어의 /ウ/는 원순모음 /u/가 아닌 /w/이다. 도쿄방언(표준어)에서 /ウ/단을 /u/로 발음할때는 불만이 있다는 늬앙스를 전달할 때이다. 한국어처럼 항상 /u/를 사용한다면 언제나 불만에 차있다는 늬앙스를 전달하게 될 수도 있다
4. 「私の鉛筆です」를 /ワタシノエンピチュデス/처럼 발음한다면 어린애나 혀가 짧은 사람같다는 인상을 준다.
영어의 경우... 아프다는 상태를 전달하기 위해 I'm ill이라고 하고싶지만, 이것을 I'm eel로 발음해 버리면 "나는 뱀장어"가 되어버린다.
잘못된 인터내션도 의도하지 않는 늬앙스를 전달한다
A:その人、敦子さんですよ。
B:敦子さんですか。
여 기에서 B의 인터내션은 평조의 /敦子さんですか→/나 단승(短昇)의 /敦子さんですか↗/가 보통이다. 만약 길게 고저차를 붙여 /敦子さんですか_↗/로 말한다면 싫어한다는 인상이 전달되버린다. 감정적평가가 의도와 다르게 전달된다면 발음이 틀린것 이상으로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통하기만 하면 OK?
서 로 다른 사투리를 쓰는 두명이 대화를 한다면 피곤해지는 경우가 있다. 일단 의미의 전달은 되었으니까 상관 없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말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부담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외국어학습에서 "의사전달"을 최종목표라 생각, "서로 뜻만 통하면 OK"라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 "의사전달"이 매끄럽게 이뤄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무엇이 영향을 끼치는가?
미국에서 외국학습자의 영어발음에 어떤것들이 관여하는지 연구된적이 있다고 한다. 중요요소로는 "모국어", "발음모방능력", "재미기간", "발음에관한 관심도"의 4개였다고 하는데, 의외로 "영어학습기간"과 "발음교육의 유무"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연구결과가 사실이라면 (국내에서)일본어공부(문법, 독해, 한자, 청해...)를 아무리 오래해도 발음이 향상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것이다. 발음교육의 유무가 큰 영향을 주지 못했으므로 발음공부를 할 필요도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적어고 꾸준히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모방능력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수련하는것이 정확한 발음에 다가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왜 음성학은 등한시 되는가?
"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알 수 없다 ", "무엇을 어디까지 가르치면 좋을지 알 수 없다", "적당한 교재교구가 없다", 바로 이것이 강사측의 입장이자 진실이다. 더우기 「月」-「好き」「角」-「カード」「桃」-「腿」등 단음, 특수박, 악센트의 미니멀페어(단어의 최소대. 비교발음 훈련에 자주 사용된다)수업에 관해서도 "미니멀페어의 수업은 단조롭고 학습자가 지루해 하므로 가르치고 싶지 않다", "미니멀페어수업은 학습자가 긴장하므로 하지 않는 편이 좋다"라는 얘기도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학습자가 싫어하니까 한자수업은 하지 않는다, 문법도 가르치지 않는다"라고 할 사람은 없을것이다. 오히려 강사의 입장에서는 지루하거나 긴장하지 않도록 나름의 수업방식을 연구해 학습의욕을 높이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잘못된 발음은 의도하지 않은 "내용"까지 전달해 버린다
1. 만약 松田(matsuda)를 찾는데 つ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해 일본인이 듣기에 masuda로 들린다면 松田가 아닌 増田를 찾는것으로 오인 될 것이다.
2. 만약 笠井(kasai)를 찾는데 첫박의 /ka/를 유기음 ㅋ(/kha/) 으로 발음한다면 일본인이 듣기에는 화가나서 찾고있는듯한 인상을 준다
3. 일본어의 /ウ/는 원순모음 /u/가 아닌 /w/이다. 도쿄방언(표준어)에서 /ウ/단을 /u/로 발음할때는 불만이 있다는 늬앙스를 전달할 때이다. 한국어처럼 항상 /u/를 사용한다면 언제나 불만에 차있다는 늬앙스를 전달하게 될 수도 있다
4. 「私の鉛筆です」를 /ワタシノエンピチュデス/처럼 발음한다면 어린애나 혀가 짧은 사람같다는 인상을 준다.
영어의 경우... 아프다는 상태를 전달하기 위해 I'm ill이라고 하고싶지만, 이것을 I'm eel로 발음해 버리면 "나는 뱀장어"가 되어버린다.
잘못된 인터내션도 의도하지 않는 늬앙스를 전달한다
A:その人、敦子さんですよ。
B:敦子さんですか。
여 기에서 B의 인터내션은 평조의 /敦子さんですか→/나 단승(短昇)의 /敦子さんですか↗/가 보통이다. 만약 길게 고저차를 붙여 /敦子さんですか_↗/로 말한다면 싫어한다는 인상이 전달되버린다. 감정적평가가 의도와 다르게 전달된다면 발음이 틀린것 이상으로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통하기만 하면 OK?
서 로 다른 사투리를 쓰는 두명이 대화를 한다면 피곤해지는 경우가 있다. 일단 의미의 전달은 되었으니까 상관 없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말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부담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외국어학습에서 "의사전달"을 최종목표라 생각, "서로 뜻만 통하면 OK"라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 "의사전달"이 매끄럽게 이뤄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무엇이 영향을 끼치는가?
미국에서 외국학습자의 영어발음에 어떤것들이 관여하는지 연구된적이 있다고 한다. 중요요소로는 "모국어", "발음모방능력", "재미기간", "발음에관한 관심도"의 4개였다고 하는데, 의외로 "영어학습기간"과 "발음교육의 유무"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연구결과가 사실이라면 (국내에서)일본어공부(문법, 독해, 한자, 청해...)를 아무리 오래해도 발음이 향상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것이다. 발음교육의 유무가 큰 영향을 주지 못했으므로 발음공부를 할 필요도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적어고 꾸준히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모방능력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수련하는것이 정확한 발음에 다가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발음의 중요성(1)
일본어를 잘 한다는것은 어떤의미일까? 한자 1945자의 완벽한 암기? 우케미, 경어등 어려운 문법의 마스터? 사전이 필요 없을정도의 완벽한 어휘력? 여러가지 측면에서 실력을 쌓아야만 일본어를 잘 한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면서도 중요하지 않는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발음"이다. 물론 이것은 일본어에만 한정되는 내용이 아니다.
작 년 여름, 우연히 한일교류 채팅사이트에서 한국에 거주중인 일본인과 채팅 후 그것이 오프모임으로 이어져 최근까지 10 수명의 일본인들과 꾸준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인들의 한국어 실력은 대체로 좋지 않았으므로 내쪽에서 일본어로 얘기를 했기에 부정확한 한국어를 듣는 기분이 어떤건지 별로 느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동남아노동자를 위한 방송(MWTV)의 개국 1주년 녹화영상을 보게 되었고, 퍼펙트한 문법이나 외국인에게 어려울것이라 생각되는 구어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으로는 발음의 어색함이 전혀 커버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동안 나의 엉성한 발음을 들어온 일본인들의 느낌도 별다를게 없을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뒷통수를 얻어맞은듯한 느낌이다.
모국어의 간섭현상은 외국어 학습에서 엄청난 문제가되는데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일본어 학습시 틀리기 쉬운 예를 들자면, 악센트가 없는 모음이 애매하게 되는 현상(예-요코하마>여커헤머), 악센트가 있는 모음이 길어지는 현상(예=도코>도오코)등 서양인의 한국어에서도 자주 보이는 버터맛 발음이 나오는데 이정도면 알아듣기가 괴로울거다. 물론 나의 발음은 일본인에게 충분히 통한다.
나 뿐 아니라 대다수의 한국인들의 일어발음은 큰 문제없이 일본인에게 통할것이다. 다행히도 한국어와 일본어의 발음이 그나만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3~6개월 정도 배운 일본인들의 한국어발음은 한국에서 몇년정도 거주한 방글라데시인, 네팔인의 발음보다 정확하니 아마 틀림없을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정도로는 충분치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대학에서 영어시간에 어떤 교수는 발음보다 내용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며 아인슈타인의 독일어억양 영어를 갖고 시비를 건 사람은 없다고 했다. 발음에 신경을 쓰는것보다 전달하려는 내용 그 자체와 문법(정확히는 작문)에 신경을 쓰라는 얘기이다. 일견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아인슈타인이기 때문이다! 말이라는건 단지 의미만 전달하는건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목소리, 억양, 말투 등에서 생각 이상으로 내용외의 많은것이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만큼은 어쩔 수 없겠지만 외국어의 경우 깨끗하고 정확한 발음을 구사한다면 어눌해보인다는 인상을 주는것을 막고 스마트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것이다.
문제는 일본어를 포함한 어느 외국어라도 대체로 음성론이 중시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대부분의 외국어 학습자들에게 공통된 현상이겠지만 발음은 대략 한국어의 음가중 비슷하다고 생각되는것으로 마음대로 대체해버리고 일단 문법과 독해부터 실력을 키우게 될거다. 하지만 이런식의 공부법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霧와 義理를 한국어 발음으로 대체해 둘 다 "기리"라고 외어버리면 글로 쓸 경우 어느쪽에 탁음이 붙는지 헷갈려버린다. 만약 "키리"와 "기리"라고 외어버리면 어디에 탁음을 붙이는지 헷갈리지는 않겠지만 일본어에는 구분도 없는 유기음과 무기음으로 멋대로 き와 ぎ를 구분해버리게 된다. 전자도 정확한 발음이 아닌건 매한가지이지만 "기리"라는 발음은 霧에는 상당히 가까우므로 그나마 하나는 맞춘거다. 하지만 후자는 霧와 義理의 발음을 둘 다 틀리고 있다.
이런식으로 멋대로 음가를 대체한 발음은 회화시에도 그대로 나오게 되며, 한번 정해진 발음은 간단히 고쳐지지도 않는다. 단어의 의미나 동사/형용사변화를 잘못외운게 있다면 새로 외우면 그뿐이자만 한번 엉터리로 익힌 발음을 정확히 바로잡으려면 그와 비교도 안되는 노력이 들어간다. 따라서 어렵다고 생각해 발음은 뒤로 돌려버릴게 아니라 제일 처음에 일단 음성론부터 들어가는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일본어의 발음중 어려운 부분이 많겠지만 먼저 얘기하고 싶은건 유성음과 무성음의 구분이다. 언어에서 구분이 되는 음가는 대립관계에 있다고 하는데 일본어는 알파벳을 문자로 쓰는 언어처럼 유성음과 무성음이 대립한다. 하지만 한국어는 유성음과 무성음이 대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분해 듣는게 어렵고 직접 구분해 발음하기도 힘들다. 반대로 일본어는 유기음(ㅋ, ㅌ, ㅍ)과 무기음(ㄲ, ㄸ, ㅂㅂ)의 대립이 없다. 실제로 "카, 까". "타, 따". "파, 빠"의 차이점을 묻는 일본인에게 각각의 발음을 들려줘도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한국인의 감각으로는 "か"와 "が"가 "카"와 "가"에 거의 비슷하게 대응한다고 생각하겠지만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일본어 교사라면 한국인은 "か"와 "が"를 구분해 발음하지 못한다고 볼것이다.
한국어에 무성음(청음)과 유성음(탁음)을 구분해 다른 어휘로 생각하는 것은 없으므로 한국인은 의도적으로 유성음, 무성음을 내기는 어렵다. 자음이 놓이는 위치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성, 무성의 구분이 생긴다. "아가"와 "가락"에서 똑같은 "가"가 들어가고, 둘 다 같은 음가를 갖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전자는 유성음, 후자는 무성음이다. 한국인이 言語(げんご)를 발음한다면 한국어에서 어두에 유성음이 오지 않으므로 일본인이 듣기에는 "けんご"로 들리게 된다. 그나마 뒤의 語가 ご로 발음되는건 "아가"의 "가"가 한국인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유성음으로 발음되는것과 마찬가지로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반대로 일본인이 한국어를 배울경우 ㄴ, ㅇ, ㅁ등의 받침에서 고전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일본어에도 ㄴ, ㅇ, ㅁ받침이 있다. 일본어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ん의 뒤에 오는 발음에 따라 ん이 ㄴ, ㅇ, ㅁ받침중 하나로 쓰이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ん의 발음이 변화한다는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선택적으로 구분해 쓰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어 음성론은 시중에 교재가 많지 않지만 "이해하기 쉬운 음성"이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저자도 일본인이고 일본인을 대상으로하는 JEES(일본어교육능력검정시험)수험서라(번역본이 아니다. 100%일본어로 되어있다) 내용이 결코 쉽지 않으므로 일본어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싶다.
단지 일본어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목적이거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등 취미를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면 발음같은건 아무래도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인과 대화를 할 일이 많다면 정확한 발음을 공부해보는게 어떨까? 열심히 반복연습을 한다면 자신의 인상이 전혀 다르게 전달 될 날이 올것이다.
よくわかる音声(이해하기 쉬운 음성)의 링크. 책 내용의 일부를 볼 수 있다.
http://www.amazon.co.jp/gp/product/4872349415/ref=sib_rdr_dp/249-1623305-2220350?ie=UTF8&no=465392&me=AN1VRQENFRJN5&st=books
작 년 여름, 우연히 한일교류 채팅사이트에서 한국에 거주중인 일본인과 채팅 후 그것이 오프모임으로 이어져 최근까지 10 수명의 일본인들과 꾸준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인들의 한국어 실력은 대체로 좋지 않았으므로 내쪽에서 일본어로 얘기를 했기에 부정확한 한국어를 듣는 기분이 어떤건지 별로 느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동남아노동자를 위한 방송(MWTV)의 개국 1주년 녹화영상을 보게 되었고, 퍼펙트한 문법이나 외국인에게 어려울것이라 생각되는 구어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으로는 발음의 어색함이 전혀 커버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동안 나의 엉성한 발음을 들어온 일본인들의 느낌도 별다를게 없을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뒷통수를 얻어맞은듯한 느낌이다.
모국어의 간섭현상은 외국어 학습에서 엄청난 문제가되는데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일본어 학습시 틀리기 쉬운 예를 들자면, 악센트가 없는 모음이 애매하게 되는 현상(예-요코하마>여커헤머), 악센트가 있는 모음이 길어지는 현상(예=도코>도오코)등 서양인의 한국어에서도 자주 보이는 버터맛 발음이 나오는데 이정도면 알아듣기가 괴로울거다. 물론 나의 발음은 일본인에게 충분히 통한다.
나 뿐 아니라 대다수의 한국인들의 일어발음은 큰 문제없이 일본인에게 통할것이다. 다행히도 한국어와 일본어의 발음이 그나만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3~6개월 정도 배운 일본인들의 한국어발음은 한국에서 몇년정도 거주한 방글라데시인, 네팔인의 발음보다 정확하니 아마 틀림없을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정도로는 충분치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대학에서 영어시간에 어떤 교수는 발음보다 내용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며 아인슈타인의 독일어억양 영어를 갖고 시비를 건 사람은 없다고 했다. 발음에 신경을 쓰는것보다 전달하려는 내용 그 자체와 문법(정확히는 작문)에 신경을 쓰라는 얘기이다. 일견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아인슈타인이기 때문이다! 말이라는건 단지 의미만 전달하는건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목소리, 억양, 말투 등에서 생각 이상으로 내용외의 많은것이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만큼은 어쩔 수 없겠지만 외국어의 경우 깨끗하고 정확한 발음을 구사한다면 어눌해보인다는 인상을 주는것을 막고 스마트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것이다.
문제는 일본어를 포함한 어느 외국어라도 대체로 음성론이 중시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대부분의 외국어 학습자들에게 공통된 현상이겠지만 발음은 대략 한국어의 음가중 비슷하다고 생각되는것으로 마음대로 대체해버리고 일단 문법과 독해부터 실력을 키우게 될거다. 하지만 이런식의 공부법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霧와 義理를 한국어 발음으로 대체해 둘 다 "기리"라고 외어버리면 글로 쓸 경우 어느쪽에 탁음이 붙는지 헷갈려버린다. 만약 "키리"와 "기리"라고 외어버리면 어디에 탁음을 붙이는지 헷갈리지는 않겠지만 일본어에는 구분도 없는 유기음과 무기음으로 멋대로 き와 ぎ를 구분해버리게 된다. 전자도 정확한 발음이 아닌건 매한가지이지만 "기리"라는 발음은 霧에는 상당히 가까우므로 그나마 하나는 맞춘거다. 하지만 후자는 霧와 義理의 발음을 둘 다 틀리고 있다.
이런식으로 멋대로 음가를 대체한 발음은 회화시에도 그대로 나오게 되며, 한번 정해진 발음은 간단히 고쳐지지도 않는다. 단어의 의미나 동사/형용사변화를 잘못외운게 있다면 새로 외우면 그뿐이자만 한번 엉터리로 익힌 발음을 정확히 바로잡으려면 그와 비교도 안되는 노력이 들어간다. 따라서 어렵다고 생각해 발음은 뒤로 돌려버릴게 아니라 제일 처음에 일단 음성론부터 들어가는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일본어의 발음중 어려운 부분이 많겠지만 먼저 얘기하고 싶은건 유성음과 무성음의 구분이다. 언어에서 구분이 되는 음가는 대립관계에 있다고 하는데 일본어는 알파벳을 문자로 쓰는 언어처럼 유성음과 무성음이 대립한다. 하지만 한국어는 유성음과 무성음이 대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분해 듣는게 어렵고 직접 구분해 발음하기도 힘들다. 반대로 일본어는 유기음(ㅋ, ㅌ, ㅍ)과 무기음(ㄲ, ㄸ, ㅂㅂ)의 대립이 없다. 실제로 "카, 까". "타, 따". "파, 빠"의 차이점을 묻는 일본인에게 각각의 발음을 들려줘도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한국인의 감각으로는 "か"와 "が"가 "카"와 "가"에 거의 비슷하게 대응한다고 생각하겠지만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일본어 교사라면 한국인은 "か"와 "が"를 구분해 발음하지 못한다고 볼것이다.
한국어에 무성음(청음)과 유성음(탁음)을 구분해 다른 어휘로 생각하는 것은 없으므로 한국인은 의도적으로 유성음, 무성음을 내기는 어렵다. 자음이 놓이는 위치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성, 무성의 구분이 생긴다. "아가"와 "가락"에서 똑같은 "가"가 들어가고, 둘 다 같은 음가를 갖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전자는 유성음, 후자는 무성음이다. 한국인이 言語(げんご)를 발음한다면 한국어에서 어두에 유성음이 오지 않으므로 일본인이 듣기에는 "けんご"로 들리게 된다. 그나마 뒤의 語가 ご로 발음되는건 "아가"의 "가"가 한국인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유성음으로 발음되는것과 마찬가지로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반대로 일본인이 한국어를 배울경우 ㄴ, ㅇ, ㅁ등의 받침에서 고전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일본어에도 ㄴ, ㅇ, ㅁ받침이 있다. 일본어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ん의 뒤에 오는 발음에 따라 ん이 ㄴ, ㅇ, ㅁ받침중 하나로 쓰이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ん의 발음이 변화한다는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선택적으로 구분해 쓰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어 음성론은 시중에 교재가 많지 않지만 "이해하기 쉬운 음성"이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저자도 일본인이고 일본인을 대상으로하는 JEES(일본어교육능력검정시험)수험서라(번역본이 아니다. 100%일본어로 되어있다) 내용이 결코 쉽지 않으므로 일본어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싶다.
단지 일본어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목적이거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등 취미를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면 발음같은건 아무래도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인과 대화를 할 일이 많다면 정확한 발음을 공부해보는게 어떨까? 열심히 반복연습을 한다면 자신의 인상이 전혀 다르게 전달 될 날이 올것이다.
よくわかる音声(이해하기 쉬운 음성)의 링크. 책 내용의 일부를 볼 수 있다.
http://www.amazon.co.jp/gp/product/4872349415/ref=sib_rdr_dp/249-1623305-2220350?ie=UTF8&no=465392&me=AN1VRQENFRJN5&st=books
목요일, 2월 22, 2007
물욕 일기 #2 ~CHROMATIC TUNER for Calibration~
비싼 가격에도 이 모델로 구입했던 이유는 아날로그 바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바늘 표시는 아주 작은 피치 변화에 둔감해 애매한 감이 있지만 아날로그 바늘은 아주 미묘한 피치의 차이에도 반응을 보여주는 섬세함이 있었으니깐
오카리나를 연습한지 너무 오래되어 이 녀석 앞에서 캘러브레이션을 실시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OTL 확실히 실력이 무뎌졌음
상급의 연주자가 옆에서 1:1 마크로 지적해준다면 압박 좀 받아가며 연습할 수 있어 무척 좋지만 나처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크로매틱 튜너'는 정말 유용하다. 아날로그 바늘이 정중앙에서 가능한 한 흔들리지 않고 정확한 피치를 유지하면서 캘러브레이션을 실시하는 게 관건인데 기계란 건 언제나 그렇지만 냉정하게 사실을 말해준다. 스승과 달리 잔소리도 안하므로 스트레스가 적지 않은가!
어찌됐건 대강 캘러브레이션 후에 연습용으로 집어든 곡은 'FINAL FANTASY Ⅷ'의 'Eyes On Me'
연주자의 곡을 듣고 반주를 깐 후 악보를 보며 연습하는데
이런!
악보가 틀렸지 않은가!!
연주자의 곡을 들으며 악보를 전면 수정.. 악보 만든 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정말 많이도 틀려있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 결국 연주자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악보를 완성했더니 밤이 깊어 연습을 더 할 수 가 없다..;;
화요일, 2월 20, 2007
OblivioN
과거 내가 어린 시절 즐겁게 플레이했던 '인터럽트(액션)', '일루젼 블레이즈(슈팅)', '피 앤 기티 스페셜(액션)'을 제작 했던 '패밀리 프로덕션'의 '신봉건' 씨가 새운 '펜타비전'에서 제작한 'DJ MAX' 그리고 최근 발매된 'DJ MAX Portable 2' '신봉건' 씨는 내가 유일하게 그 센스를 인정하는 국내 크리에이터..
'DJ MAX Portable'을 플레이 하다 이 뮤직 비디오가 너무 맘에 들어 포스팅
내가 ‘레오파드’에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
이거랑 '부트 캠프' 때문이다!
최근 블로그의 테마를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를 했는데 '구글'과 '애플'은 닮은 점이 많다는 느낌이 든다.
금요일, 2월 16, 2007
수요일, 2월 14, 2007
토요일, 2월 10, 2007
ZARD 2?
블로그 상단 중앙의 버튼을 눌러 배경 음악을 중지 시키고 보세요!
'사에구사 유카'.. 내 어린 시절을 일부 물들인 빙 계열 락 그룹 'ZARD'의 아류랄까.. 신형이랄까.. 느낌이 뭔가 비슷하면서도 참신한 구석이 있다.
원래 ‘ZARD’의 코드도 말총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그리고 수수한 옷차림이었으니 이건 어느 정도 의심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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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2월 08, 2007
'마징카이저'엔 '보스'죠!
최근 오랜만에 맞는 여유로움으로 마음껏 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번 달 지나면 이것도 못한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불태우고 있다.
군대 가기 전에 반만 깬 '제2차 슈퍼로봇대전 알파'를 잡았다.
로봇 대전 할 때 불타오르는 소위 '남자의 혼'이라고 하는 불타는 마음이야 일본 갔을 때 만난 일본 게이머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건만 나이 먹으니 불타오르기 쉽지 않다.
그냥 의무감에 가깝게 열 올리며 클리어 하고 있었는데
'제42화 공포! 일본 제압작전!! -후편-'을 클리어 하니 '진 겟타 1'과 '마징카이저'를 얻었다.
'마징가'의 '브레스트 파이어', ‘그레이트 마징가’의 '선더 브레이크', ‘겟타 드래곤’의 '겟타 빔'을 한꺼번에 쏘는 '파이널 다이내믹 스페셜(조낸 사기성 필살기)'을 포기하고 그냥 '진 겟타 1'이랑 '마징카이저'를 키우기로 했다.
근데 문제는 ‘마징카이저’에 태울 파일럿!
'진 겟타 1'에야 '료마' 밖에 태울 수 없건만 '마징카이저'에는 태울 수 있는 애들이 너무 많았다.
고민하다가 누군가 이야기한 '마징카이저에는 보스죠!'라는 한마디에 ‘보스보롯트(깡통 로봇)’의 '보스'를 마징카이저에 태우고 ‘그레이트 마징가’의 '테츠야'는 보급 부대 아저씨로 전락 시켜버렸다.
결과는 매우 만족!
주인공은 잘 생겨야 한다는 그릇된 관행을 역행하여 탑승시킨 '보스' 그리고 아저씨 얼굴답게 보급 부대 '보스보롯트'를 조종하는 아저씨가 되어버린 '테츠야'..
진짜 한동안 은근한 코믹함에 미소 지으며 플레이했다.
군대 가기 전에 반만 깬 '제2차 슈퍼로봇대전 알파'를 잡았다.
로봇 대전 할 때 불타오르는 소위 '남자의 혼'이라고 하는 불타는 마음이야 일본 갔을 때 만난 일본 게이머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건만 나이 먹으니 불타오르기 쉽지 않다.
그냥 의무감에 가깝게 열 올리며 클리어 하고 있었는데
'제42화 공포! 일본 제압작전!! -후편-'을 클리어 하니 '진 겟타 1'과 '마징카이저'를 얻었다.
'마징가'의 '브레스트 파이어', ‘그레이트 마징가’의 '선더 브레이크', ‘겟타 드래곤’의 '겟타 빔'을 한꺼번에 쏘는 '파이널 다이내믹 스페셜(조낸 사기성 필살기)'을 포기하고 그냥 '진 겟타 1'이랑 '마징카이저'를 키우기로 했다.
근데 문제는 ‘마징카이저’에 태울 파일럿!
'진 겟타 1'에야 '료마' 밖에 태울 수 없건만 '마징카이저'에는 태울 수 있는 애들이 너무 많았다.
고민하다가 누군가 이야기한 '마징카이저에는 보스죠!'라는 한마디에 ‘보스보롯트(깡통 로봇)’의 '보스'를 마징카이저에 태우고 ‘그레이트 마징가’의 '테츠야'는 보급 부대 아저씨로 전락 시켜버렸다.
결과는 매우 만족!
주인공은 잘 생겨야 한다는 그릇된 관행을 역행하여 탑승시킨 '보스' 그리고 아저씨 얼굴답게 보급 부대 '보스보롯트'를 조종하는 아저씨가 되어버린 '테츠야'..
진짜 한동안 은근한 코믹함에 미소 지으며 플레이했다.
목요일, 2월 01, 2007
라이카를 사랑한 남자 #1 ~긴이치 소프트 버튼~
월요일, 1월 29, 2007
스노보드를 타고 왔습니다.
26일부터 28일까지 2박 3일로 갔다 왔는데
네 아주 미친 듯이 타다 왔습니다.
겨울에 타는 스노보드보다 신나는 것도 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찾자면 USJ 정도?
정말 그 속도감이랑 스릴에서 오는 아드레날린은 잊을 수 없지요
갔다 와서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온 몸이 다 아프네요 유격 받은 다음날 하고 똑같습니다.
네 아주 미친 듯이 타다 왔습니다.
겨울에 타는 스노보드보다 신나는 것도 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찾자면 USJ 정도?
정말 그 속도감이랑 스릴에서 오는 아드레날린은 잊을 수 없지요
갔다 와서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온 몸이 다 아프네요 유격 받은 다음날 하고 똑같습니다.
금요일, 1월 2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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