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5월 31, 2007

영어 테이프를 듣느라 카세트를 쓰고 있는데 옛날엔 몰랐는데 기계적 메커니즘이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요일, 5월 30, 2007

ZARD 사망

ZARD의 싱어 송 라이터 '사카이 이즈미(坂井泉水(いずみ))(본명・카마치 사치코(蒲池幸子)'씨가 2007년 5월 27일 오후, 향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목소리였고 저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를 물들여주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충격이고 슬픕니다. 이로써 제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아티스트들은 모두 사망하거나 해체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것이 '사카이 이즈미'씨..
40세의 나이까지 혼자 살고 거기다 암 투병 중이었던 그녀의 어이없는 사망 소식.. 마치 슬픈 영화처럼 가버렸네요..





reference

http://www.yomiuri.co.jp/index.htm




ZARD 사카이 이즈미씨, 투병중인 병원에서 추락사
2007년 05월 28일 12시 20분

 「ZARD」의 보컬이자 작사가인 坂井泉水(さかい・いずみ(사카이・이즈미)씨(40)=본명·蒲池(카마치)幸子(사치코)=씨가 27일 오후, 좌뇌상으로, 도쿄 신주쿠의 케이오 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것이 28일 알려졌다.

 사카이씨는 작년 6월, 자궁경부암을 앓아,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다. 소속 사무소등에 의하면, 26일 이른 아침, 일과인 산책을 한 후에 병실로 돌아오는 도중 , 병원의 비상용 슬로프의 난간으로부터 추락했다고 한다.

 경시청 요츠야서의 조사로는, 26일 오전 5시 40분쯤, 병원의 슬로프 근처에 사카이씨가 넘어져 있는 것을 지나가는 사람이 찾아냈다. 난간(높이 약 1미터)에 남아 있던 지문 등에서, 높이 약 3미터의 곳부터 슬로프 바깥쪽으로 추락했다고 보여져 자세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사카이씨는, 모델로서 활동하고 있던 91년, 「Good­bye My Loneliness」로 데뷔.「揺れる想(おも)い」 「君がいない」 등, 차례차례로 대히트를 날렸다.164만매(오리콘 조사)를 판매한「負けないで」는, 94년의 선발 고교 야구의 입장 행진곡이 되었다.

 한편, 작사가로서 인기 아티스트에게 악곡을 제공, 테레사·텐의 「あなたと共に生きてゆく」나 DEEN의 「瞳そらさないで」등의 히트 곡을 낳았다. 뛰어난 경력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출연을 앞에 두고 한정된 영상 밖에 공개하지 않는 등, 독특한 노출 수법으로 화제를 모았다.

 작년 데뷔 15주년을 맞이해 이번 가을에는 신 앨범의 발매를 예정.3년만의 투어도 준비되어 있었다. 원래 팝스 그룹이었지만, 올해는 사카이씨가 「ZARD」의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reference

http://www.asahi.com/



「ZARD / 사카이 이즈미 씨를 그리워하는 모임」의 안내

 ZARD 의 보컬 / 작사가·사카이 이즈미 씨는, 1991년 2월 10일의 데뷔 이래 지금까지 쭉 세상의 사람들에게 노래를 통해 마음의 평온함을 계속 주어 왔습니다.
1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음악 활동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앞으로도 잊혀질 리가 없는 노래를 남길 수 있었던 것도,ZARD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신 팬 여러분들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 모두의 덕분입니다.

 사카이 이즈미 씨가 타계하게 된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만,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목소리로 여러분을 격려해, 또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갈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또, 그것이 사카이 이즈미 씨의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스탭 일동이라도, 그 소원을 소중히 해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사카이 이즈미 씨를 그리워하며, 아래와 같이 , 팬 분들이나 관계자 여러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음악장」을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나갈ZARD 의 음악을 느껴 사카이 이즈미 씨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행사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많은 여러분의 참가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ZARD / 사카이 이즈미 씨를 그리워하는 모임 사무국」

【 기 】

1, 날짜   2007 년6 월27 일 ( 수)

1, 시간 미정

1, 장소 아오야마 장의소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오야마 2-33-20

1, 문의   B-Gram Records. / TEL : 03-3479-2371

*상세한 일정은, 후일 홈 페이지 등에서 공표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헌화 받아, 정말로 감사합니다.
도쿄·오사카에 있는 헌화대에 대해서는, 5월 31일(목)까지라고 합니다.


reference

http://wezard.net/index.html

목요일, 5월 17, 2007

Cartier-Bresson, Henri

Henri Cartier-Bresson
French photographer whose humane, spontaneous photographs helped establish photojournalism as an art form. His theory that photography can capture the meaning beneath outward appearance in instants of extraordinary clarity is perhaps best expressed in his book Images à la sauvette (1952; The Decisive Moment).

Cartier-Bresson was born and attended school in a village not far from Paris. In 1927–28 he studied in Paris with André Lhote, an artist and critic associated with the Cubist movement. Lhote implanted in him a lifelong interest in painting, a crucial factor in the education of his vision. In 1929 Cartier-Bresson went to the University of Cambridge, where he studied literature and painting.

As a boy, Cartier-Bresson had been initiated into the mysteries of the simple “Brownie” snapshot camera. But his first serious concern with the medium occurred about 1930, after seeing the work of two major 20th-century photographers, Eugène Atget and Man Ray. Making use of a small allowance, he traveled in Africa in 1931, where he lived in the bush, recording his experiences with a miniature camera. There he contracted blackwater fever, necessitating his return to France. The portability of a small camera and the ease with which one could record instantaneous impressions must have struck a sympathetic chord, for in 1933 he purchased his first 35-mm Leica. The use of this type of camera was particularly relevant to Cartier-Bresson. It lent itself not only to spontaneity but to anonymity as well. So much did Cartier-Bresson wish to remain a silent, and even unseen, witness, that he covered the bright chromium parts of his camera with black tape to render it less visible, and he sometimes hid the camera under a handkerchief. The man was similarly reticent about his life and work.

Hyères, France, gelatin silver print by Henri Cartier-Bresson, …Courtesy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All Rights Reserved, Julien Levy Collection, gift of Jean and Julien Levy, 1975.1134In more than 40 years as a photographer, Cartier-Bresson wandered continually around the world. But there was nothing compulsive about his travels, and he explicitly expressed a desire to move slowly, to “live on proper terms” in each country, to take his time, so that he became totally immersed in the environment.

In 1937 Cartier-Bresson produced a documentary film, his first, on medical aid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date also marked his first reportage photographs made for newspapers and magazines. His enthusiasm for filmmaking was further gratified when, from 1936 to 1939, he worked as an assistant to the film director Jean Renoir in the production of Une Partie de campagne (A Day in the Country) and La Règle du jeu (The Rules of the Game). As a photographer he felt indebted to the great films he saw as a youth. They taught him, he said, to choose precisely the expressive moment, the telling viewpoint. The importance he gave to sequential images in still photography may be attributed to his preoccupation with film.

In 1940, during World War II, Cartier-Bresson was taken prisoner by the Germans. He escaped in 1943 and the following year participated in a French underground photographic unit assigned to record the German occupation and retreat. In 1945 he made a film for the U.S. Office of War Information, Le Retour, which dealt with the return to France of released prisoners of war and deportees.

Though Cartier-Bresson's photographs had been exhibited in 1933 in the prestigious Julien Levy Gallery in New York City, a more important tribute was paid to him in 1947, when a one-man exhibition was held in that city's Museum of Modern Art. In that same year, Cartier-Bresson, in partnership with the U.S. photographer Robert Capa and others, founded the cooperative photo agency known as Magnum Photos. The organization offered periodicals global coverage by some of the most talented photojournalists of the time. Under the aegis of Magnum, Cartier-Bresson concentrated more than ever on reportage photography. The following three years found him in India, China, Indonesia, and Egypt. This material and more, taken in the 1950s in Europe, formed the subjects of several books published between 1952 and 1956. Such publications helped considerably to establish Cartier-Bresson's reputation as a master of his craft. One of them, and perhaps the best known, Images à la sauvette, contains what is probably Cartier-Bresson's most comprehensive and important statement on the meaning, technique, and utility of photography. The title refers to a central idea in his work—the decisive moment—the elusive instant when, with brilliant clarity, the appearance of the subject reveals in its essence the significance of the event of which it is a part, the most telling organization of forms. Later books include Cartier-Bresson's France (1971), The Face of Asia (1972), and About Russia (1974).

He was singularly honoured by his own country in 1955, when a retrospective exhibition of 400 of his photographs was held at the Museum of Decorative Arts in Paris and was then displayed in Europe, the United States, and Japan before the photographs were finally deposited in the Bibliothèque Nationale (National Library) in Paris. In 1963 he photographed in Cuba; in 1963–64, in Mexico; and in 1965, in India. The French filmmaker Louis Malle recalled that, during the student revolt in Paris in May 1968 Cartier-Bresson appeared with his 35-mm camera and, despite the explosive activities, took photographs at the rate of only about four per hour.

In the late 1960s Cartier-Bresson began to concentrate on making motion pictures—including Impressions of California (1969) and Southern Exposures (1971). He believed that still photography and its use in pictorial magazines was, to a large extent, being superseded by television. On principle, he always avoided developing his own prints, convinced that the technical exigencies of photography were a harmful distraction. Similarly, he directed the shooting of films and did not wield the camera himself. With this medium, however, he was no longer able to work unobtrusively by himself. Cartier-Bresson devoted his later years to drawing.

His Leica—his notebook, as he called it—accompanied him wherever he went, and, consistent with his training as a painter, he always carried a small sketch pad. There was for Cartier-Bresson a kind of social implication in the camera. To his mind, photography provided a means, in an increasingly synthetic epoch, for preserving the real and humane world.

Aaron Scharf


앙리 까르띠에-브레송
그의 인간적이며 자연스러운 사진들은 보도사진이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숨어 있는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라는 그의 이론은 저서인 〈결정적 순간 Images à la sauvette〉(1952)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파리 근교에서 태어나 그곳 학교에 다녔으며, 1927~28년 파리에서 입체파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예술가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로트와 공부했다. 로트는 카르티에가 회화에 대해 평생의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인물이었는데 사물을 보는 훈련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29년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문학과 회화를 공부했다.

소년시절 간단한 브라우니, 스냅샷 카메라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그 매체에 대한 최초의 관심은 1930년경 20세기의 두 중요한 사진작가인 외젠 아제와 맨 레이의 작품을 보고 나서였다. 그는 얼마간의 비용을 마련해 1931년 아프리카의 오지에 살면서 소형(35㎜)사진기로 자신이 겪은 것들을 기록했으며, 흑수열병에 걸려 불가피하게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소형사진기의 휴대성과 즉각적인 인상을 쉽게 기록할 수 있는 편리성에 공감하게 된 그는 1933년 35㎜ '라이카' 사진기를 샀다. 이런 종류의 사진기는 그에게 특히 잘 맞았는데 자연스러움뿐만 아니라 익명의 상태로 촬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소리내지 않고 심지어는 보이지도 않고, 남의 눈에 띄는 것을 몹시 꺼려했기 때문에 사진기 렌즈의 밝은 크롬 부분을 검정 테이프로 가렸으며 사진기를 손수건 밑으로 숨기기도 했다. 그는 실생활과 작품이 비슷한 과묵한 사람이었다. 사진작가로 40여 년간 지내오면서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으나 여행을 하는 데 강압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으므로 천천히 움직이며, 각 나라에서 '적절한 기간 동안 살고', 여유있게 시간을 사용하는 덕택에 그는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게 되었다.

1937년 라트나 모히니와 결혼했고, 자신이 만든 최초의 영화인 스페인 내란의 의료원조에 대한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그해는 그가 처음으로 신문과 잡지사를 위해 현장 보도사진들을 찍은 해이기도 하다. 영화에 대한 열정은 1936~39년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조수로 〈야유회 Une Partie de campagne〉·〈게임의 법칙 La Règle du jeu〉을 만들면서 더 충족시킬 수 있었다. 사진가로서 그는 소년시절에 본 위대한 영화들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가 말하기를 그것들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순간, 즉 인상적인 시점을 정확하게 선택하도록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정지된 낱장의 사진에 연속되는 영상의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그의 영화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중 1940년 독일의 포로가 되었다가 1943년 탈출하여, 이듬해 독일의 점령과 퇴각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프랑스 지하운동조직의 사진단에 참여했다. 1945년에는 미국 육군정보국을 위해 석방된 전쟁포로와 추방자들의 프랑스 귀환을 다룬 영화 〈귀향 Le Retour〉을 제작했다.

1933년 그의 사진들이 뉴욕 시의 권위 있는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전시되었으며, 194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이 개최되었을 때 비로소 그에 대한 비중있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미국의 사진가 로버트 카파등과 공동으로 매그넘포토스라고 알려진 협동 사진대행사를 창설했는데, 그 회사는 정기간행물업체에 당시 유능한 보도사진작가들이 찍은 전세계의 사진들을 제공했다. 매그넘포토스의 후원 아래 그는 어느 때보다도 보도사진에 열중했으며 이후 3년 동안 인도·중국·인도네시아·이집트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곳과 1950년대 유럽에서 모은 자료들이 1952~56년에 발간된 몇 권의 사진집의 주제를 이루었는데, 그 간행물들은 그가 자신의 특수기술에 정통한 대가라는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 그중 하나인 〈결정적 순간〉은 가장 잘 알려진 간행물로,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의 의미와 기술 및 효용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그의 중심적 사상인 포착하기 힘든 '결정적 순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눈부시게 명확한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에 피사체의 외양이 그 피사체가 포함되는 장면을 가장 효과적인 구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순간을 말한다. 그밖에 〈카르티에 브레송의 프랑스 Cartier-Bresson's France〉(1971)·〈아시아의 얼굴 The Face of Asia〉(1972)·〈러시아에 대하여 About Russia〉(1974)가 있다.

1955년 그는 프랑스 파리 장식미술박물관에서 400점의 사진으로 생애를 회고하는 개인전시회를 개최하는 큰 영예를 얻었고, 그 전시회는 유럽·미국·일본을 순회하며 열렸으며, 마지막에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그의 사진작품들이 보관되었다. 1963년에는 쿠바, 1963~64년에는 멕시코, 1965년에는 인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의 영화제작자인 루이 말이 회상하기를, 1968년 5월 파리 학생폭동 당시 카르티에 브레송은 35㎜ 사진기를 가지고 현장에서 그 격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불구하고 1시간당 4장 정도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관심을 영화제작으로 돌린 말년의 그는 〈캘리포니아 인상 Impressions of California〉(1969)·〈남부 촬영 Southern Exposures〉(1971)을 만들었다. 그는 스틸 사진과 화보잡지에서의 스틸 사진의 이용은 상당한 부분이 텔레비전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믿었다. 항상 자신의 사진을 자신이 직접 인화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사진을 기술적으로 다루는 것은 정신이 산만해져 해롭다고 믿어 영화 촬영을 감독할 때도 카메라를 직접 다루지 않았다. 카르티에 브레송은 라이카(그는 이것을 자신의 공책이라고 불렀음) 카메라를 가는 곳마다 휴대하고 다녔으며, 화가로서의 훈련을 위해 항상 작은 스케치북을 지니고 다녔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기에는 사회가 함축되어 존재했고 그의 마음속에서 사진은 점점 더 인조화되어가는 시대 속에 진실된 세계와 인간적인 세계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A. Scharf 글


reference

http://concise.britannica.com/

금요일, 5월 11, 2007

リナックスで行こう♪

우분투7.04에 3D데스크탑 BERYL을 설정해본 스크린샷. 모든 스크린샷은 클릭하면 원래크기로 볼 수 있다.(스크린샷 일부가 조금씩 깨져있는데 실제로는 깨지지 않는다. 캡쳐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는듯)

거져줘도 데스크탑에는 안쓴다는 리눅스에서 이상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델에서 윈도우 대신 리눅스(우분투)를 설치한 PC를 발매한다는 소식도 있는데 데스크탑 리눅스의 핵심에는 라이브CD와 3D데스크탑이 있는것 같다.

라이브CD는 HDD가 필요없이 CD에서 OS를 부팅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리눅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인스톨도 필요없으니 게임기를 켜보는 기분이랄까. 이것저것 4~5종의 라이브CD리눅스를 재미삼아 실행해봤었는데 결국 우분투를 하드에 인스톨해버리고야 말았다. 여지껏 사용해본 MS의 OS에서는 구경도 못해본 3D데스크탑의 아름다움과 설정의 자유도, 콘솔창이 필요없어 초보에게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synaptic팩키지관리등 매력이 상당히 많다.

기본으로 FIREFOX, GAIM, OPEN OFFICE, GIMP등의 어플리케이션이 설치되므로 안되는것도 별로 없는것 같다. 문제는 안정성인데 베릴의 설정을 건드리다보면 윈도우가 죽는다던지, 설정이 제대로 반영이 안된다던지, 여러가지 문제가 일어나는데 불안정성에 있어서는 윈도우95를 능가한다. 약 일주일간 5번 이상 재설치를 한것같다. 설정을 변경하지 않으면 셧다운을 시켜도 PC가 꺼지지 않는다거나, 하이버네이션은 어떻게 해봐도 쓸 수 없다거나 하는 문제들도 자주보인다.

몇년전에는 설치조차도 쉽게 안되던것을 생각하면 큰 발전을 이뤄왔다고 봐야할까, 아니면 7년 이상 전의 OS인 윈도우 2000수준의 안정성과 편의성도 제공하지 못하므로 그냥 없는 셈 치는게 나을까.

분명한건 고사양을 요구하지 않는 아름다운 3D데스크탑은 MS에서 제공한적이 없고, 정말로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필수 어플레케이션들은 다 들어있고 이것들이 이제껏 본적이 없는 아름다운 화면위에서 돌아간다. 그것도 공짜로! Berry Linux는 CD로 기동해도 3D데스크탑을 사용 가능하므로 관심이 있다면 한번 사용해 보기를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