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1월 11, 2007

카메라 수리 삼십 년 - 정지학

렌즈 마운트의 마지막 나사를 조이는 그의 손등에 파란 핏줄이 드러난다. 1955년 독일 베르닝 (Berning)사에서 만들어진 ‘로보트 로얄 36(Robot Royal-36).’ 세계 최초의 스프링 모터 방식의 필름 와인딩 시스템을 가졌던, 고급스럽고도 다루기 까다로웠던 랜지파인더 카메라다. 몇 십년 넘게 방치돼 꿈쩍도 않던 그 카메라가 정지학의 손에 넘어 왔다. 셔터 막, 셔터 날개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게 없는, 그야말로 폐기상태의 그 카메라가 이제 막 그의 손에 의해 수리가 끝났다. 스프링 모터를 감는다. 그리고 셔터를 누른다. 찰카닥. 찰카닥. 수 십년을 넘어 그 카메라에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무엇을 보든지 눈썰미가 있어서 손으로 만드는 것에 취미가 있었고, 어떤 때 나이차이가 꽤 나는 형과 어울려 나무판이나 함석조각을 깎고 다듬는 일을 할 때면 형보다 더 잘 한다고 칭찬을 듣기도 했다. 공부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안 했다는 연유는 아니지만, 결국에 가서 택한 직업이 타고난 손재주와 눈썰미를 바탕으로 한 카메라수리 기술이었다. 그로부터 30년. 아직도 서울 충무로의 한 허술한 건물 수평 남짓한 수리실에 앉아 고장 난 카메라를 고치고 있다. 그(52)는 그 수리센터의 사장이지만 사장답지가 않다. 카메라 수리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수십년 넘게 카메라를 만지고 다듬고 했지만, 아직도 카메라 수리와 연구에 대한 갈증은 그곳에서 함께 일하는 젊은 후배들에 뒤지지 않는다.

그가 카메라와 인연이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한 친구가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셔터를 눌러서 피사체와 똑같은 사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신기하였고 그 원리가 무척 궁금하였다. 그 것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것 (카메라)을 하나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카메라 한대 가격이 속된 말로 ‘인사동 집 한 채 값’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워낙 고가(高價)였던 시절이었고, 카메라도 흔하지 않았다. 또한 카메라를 알고 싶어도 카메라와 수리기술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곳도 없었을 뿐더러 기사자격증 같은 것을 발급하는 기관도 없었다.
60년대 남대문시장에는 TV수리기술학원, 시계수리기술학원, 사진학원, 카메라수리기술학원 등이 있기는 했지만 수강료가 비싼 편이었고, 특히 카메라의 경우 비용이 많이 들어 수강자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이 기술을 습득하려면 경험을 통해서만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밖에 없었으므로 결국은 그 바닥에서 어떤 형태로든 오래 버텨온 사람들이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행세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말에 고향인 경기도 양평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취직을 하게 된다. 부친이 과거에 면장(面長)을 지내는 등 집안형편은 남보다 비교적 나은 편이었지만, 공부하는 것에는 별 취미가 없어 졸업을 앞두고 무작정 상경한 결과였다. 당시 둘째누나가 결혼해서 서울에 살고 있었으므로 서울에만 오면 찾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왔었지만, 금방 찾지 못하고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겨우겨우 수소문에서 누나를 만날 수 있?다. 판자촌이 서울의 여기저기에 있었던 시절이었고 서울주소라는 것이 일률적으로 돼 있지 않아서 우편배달부도 몇 년 지나야 겨우 관내 주소지를 파악할 정도였던 시절이다.
매형한테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자동차정비소를 소개해 주었다. 몇 개월 동안 기름때 묻히면서 고생을 해 봤지만, 마음속으로 동경해 오던 기술이 아니었다. 당시에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선배들의 심부름이나 하면서 곁눈질로 배우던 시절이어서 처음부터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추운 겨울에 노천에서 일하는 것이 무엇보다 고역이었다. 내가 배워야 할 기술은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다시 매형의 소개로 남대문시장의 시계수리점에 들어가 시계수리 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 당시는 남대문시장이 도매업뿐만 아니라 수리기술에서도 중심지였고, 종업원들이 주인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심부름하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1년여를 보내던 중 남대문시장에서 사귄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카메라수리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의 소개로 전부터 하고 싶었던 카메라수리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남대문시장 안에 사무실이 있는데 카메라점을 돌면서 그곳에 수리의뢰 들어온 것들을 모아다가 수리만을 전문으로 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월급은 없었고 선배들과 함께 먹고 잠자리를 제공받는 정도의 대우를 받으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 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 1968년이었다. 비록 용돈수준이긴 했지만 월급을 받기 시작한 것은 3~4년이 지났을 때였다.
당시의 기술 익히는 과정은 들어가자마자 궂은일부터 해야 했었고, 조금 지나서 배우는 것이 부품명칭 외우기와 고장 나서 버려야 할 낡은 카메라를 가지고 분해-조립하는 것이 전부였다. 시계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도 정밀기계이고 많은 부속품으로 구성돼 있으므로 부품의 명칭과 위치를 일일이 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본과정이었다. 그러다가 선배가 간단한 것을 고쳐 보라고 하면 그때에야 겨우 카메라를 만져볼 수 있었다. 좀 더 지나게 되면 고장부위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어떤 곳에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느냐가 기술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그가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수리점의 주인은 그 당시에는 드물게 일본에서 기술을 익혔던 사람으로, 국내에서는 몇 명 안 되는 수준 있는 기술자로 꼽혔다. 그는 군대에 갔다 온 후에도 얼마 동안은 그 수리점에서 일을 했다. 당시에 같이 기술을 배우던 동료들이 모두 4명이었는데, 훗날 한 사람은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가서 카메라A/S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종로에서 카메라판매점을 하고 있다.

전자식카메라는 노출이나 거리조절 등 모든 것을 기계가 알아서 작동하므로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사진이 잘 나오고 카메라 가격도 상대적으로 싼 편이다. 기계식카메라는 찍고자 하는 피사체에 따라 조리개크기나 셔터속도 등 모든 것을 일일이 조작해야만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 있는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사진전문가들이 작품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자동카메라로는 안 되고 기계식 수동카메라로 촬영한다.
수리기술 수준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보니 누가 얼마동안 이 분야에 있었는가를 보고 기술자들끼리는 대충 다른 사람들의 기술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고장난 부위를 한 눈에 알아보고 빠른 시간 내에 완벽하게 고쳐낼 수 있는 능력으로 기술력을 평가받는다. 정지학은 카메라수리기술 분야에서만 30년 넘게 일해 왔으므로 그의 기술은 뛰어난 것으로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이 분야에서 그보다 오래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몇 명 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 이 일을 배우면서 느꼈던 애환은 없었느냐고 했더니, 그는 보람을 느꼈던 적도 안타까웠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기계식 카메라의 경우 고장 난 부위를 알아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카메라수리를 의뢰받아 생각지도 않은 곳에 생긴 고장부위를 밤새워 찾아내서 감쪽같이 수리했을 때, 밤잠을 못자고 힘도 들었지만 기술자로서의 자부심 때문에 뿌듯함을 느꼈다. 고장 부위가 제 부품을 끼우지 않으면 고칠 수 없는 부분이면 고장 난 부위를 찾아냈더라도 고칠 수가 없어 무척 실망스럽고 안타까워했던 적도 많았다고 한다.
한 번은 라이카M3 기종이었는데, 다른 수리기사가 고치다가, 고치기는커녕 분해한 것을 조립조차 하지 못한 상태로 그냥 보자기에 싸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그것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려서 수리해 냈을 때, 다른 기사가 못 고친 것을 고쳐냈다는 자부심으로 흐뭇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런 시간들을 거치면서 그의 기술수준은 높아 갔다. 이제는 잠깐만 살펴보고도 고장부위를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이 분야에서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10여년 전쯤에 지도를 작성하는 회사에서 독일제 항공촬영 카메라로 촬영하다가 이 카메라가 고장 나서 독일기술자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독일기술자에게 연락을 한 후, 혹시 한국에서 이 카메라를 고칠 수는 없을까 수소문하던 중 그에게 이 카메라를 들고 왔다. 그는 이를 밤새워 고쳤고 수리 후 실기테스트에도 통과되었다. 처음 보는 카메라를 고쳐냈을 때의 희열은 기술자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것이리라.

그의 기술력이 소문나자 지금은 보기 힘든 구식 기종의 카메라를 들고 와서 수리를 의뢰하는 단골손님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런 기종일수록 부품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다. 부품이 없으면 정씨는 그것을 직접 깎아 만들어 수리해 준다. 이 작업은 원래의 부품과 똑같아야 하므로 정밀한 기술력이 요구된다.
젊은 시절에 같이 기술을 배우면서 친해져서 지금도 가깝게 지내고 있는 권00 (52)씨는 그를 아주 성실하고 수리기술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공부를 하던 것이 벌써 30여년이나 흘러갔다고 회고하는 권씨는, 정지학의 기술 배우는 눈썰미와 실력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앞서서 당시에도 자신은 그의 기술력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지금 권씨는 카메라재생기술을 익혀서 외형이 고장 났거나 부서진 것을 수리.재생하고 있는데, 권씨도 30년 동안 익혀온 기술이기에 그에 못잖은 기술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주로 맡아서 수리하는 기종은 독일제 수동카메라 라이카(Leica), 롤라이 (Rollei), 핫셀블라드 (Hasselblad), 콘탁스 (Contax), 독일 코닥 (German Kodak), 포익트랜더 (Voigtlander) 등이다. 그는 수리의뢰가 들어오면 밤잠을 안 자고라도 어떻게든 고장부위를 찾아서 고쳐내는 근성을 갖고 있다. 모두가 외제 카메라이므로 부품을 구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구형 카메라를 고치러 오는 경우 부품을 다시 만들어 끼우는 기술력이 뛰어나야 한다. 셔터의 저속타임 스피드를 내는 슬로 셔터 뭉치 같은 것은 자기 부품이 아니면 수리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엔 다른 헌 카메라에서 부품을 빼서 갈아 끼울 수밖에 없다. 홍콩이나 미국 일본 등에 부품을 주문하면 구할 수는 있지만, 시간도 오래 걸리고 값도 꽤 비싼 편이라고 한다.
그의 기술력이 명동과 충무로에서 인정받게 되자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도 가끔씩 알음알음으로 찾는다. 이제는 그들의 소개를 받고 제법 많은 외국인들이 수리를 부탁해 온다. 단골인 몇몇의 미국 한인목사들과 그들의 소개로 오는 미국교포들이 주로 찾아온다. 한국 사람들의 손재주가 좋아서인지 우리의 카메라, 특히 수동카메라 수리기술력은 미국 등 다른 나라보다 훨씬 앞서있다. 따라서 잘 고치면서도 수리비용은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수리점을 찾아오는 것이다.

카메라 중에서도 독일제 카메라는 특히 기계식 고급기종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핫셀, 라이카 등은 상대적으로 가격도 상당히 비싼 편이다. 그런데도 요즘 이런 기종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젊은 시절에 갖고 싶어 했던 기종을 형편이 나아진 후 구입하는 사람들도 있고, 수집가들이 수집품으로 사서 소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독일 카메라를 좋아하고 수집하는 호사가들이 많아지면서 수리의뢰도 자주 들어온다고 한다. 카메라 수집가들은 귀한 물건들을 모아서 애장(愛藏)하고 있고 그것들을 좀처럼 팔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매물로 나오는 구형카메라가 거의 없고, 혹시 나오더라도 가격이 상당히 비싸다. 그러므로 카메라를 수집하는 취미는 돈이 많이 든다.

국내에 카메라 수집가들이 꽤 많다고 하기에 특이하게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단한 정열로 카메라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중의 한 사람으로 15년 전부터 정지학과 거래해 오고 있는 박모씨를 꼽았다. 70대인 그는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기종의 카메라로부터 최근에 나오는 카메라까지 골고루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카메라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대화하고 그것을 뜯었다가 다시 맞추기도 하는 등 그의 카메라에 대한 정성이 대단해서, 보관실에는 가족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도 희귀한 카메라를 보면 비싼 값이지만 구입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그가 소장한 카메라가 수백 점은 될 것으로 그는 추정했다. 그 중에는 초창기 카메라들도 많이 있어 카메라역사를 알아보는데 매우 귀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또 한사람은 그가 ‘카메라연구가’라고 이름붙인 김강위 (78)씨이다. 6.25때 라이카를 산 후 애호가가 돼 버린 김씨는 고장 난 구형 카메라를 일부러 사 가지고 와서 자신이 직접 수리하기도 하는 등 카메라에 관련된 여러 가지를 연구한다. 그리고 전문적인 것은 그에게 조언을 받는다. 라이카 카메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그는 스스로 분해한 사진기를 다시 맞출 수 없으면 싸가지고 와서 그가 고치는 과정을 아주 꼼꼼히 살피고, 수리가 완료되면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성능을 비교하기도 한다.
김씨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헌 라이카 카메라를 사 가지고 와서 그에게 가져온다. 그러면 그 중에서 쓸 수 있는 부품들을 모아 하나의 완전한 카메라를 만들어 준다. 몇년 전에 같은 모델의 헌 라이카 카메라를 아주 싼 가격으로 홍콩에서 1개, 미국에서 1개, 남대문시장에서 1개를 구해서 조립한 라이카가 있는데, 조립하고 나니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져서 아주 소중하게 소장품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
김씨와 그가 만난 것은 10년이 조금 넘었다. 고장 난 카메라를 가지고 수소문 끝에 찾아온 김씨는 그의 기술력을 단번에 알아봤다고 했다. 카메라 셔터를 몇 번 눌러 보더니 소리만 듣고도 이물질이 끼었다면서 카메라를 분해했는데, 정말로 셔터 뒤쪽에 필름쪼가리가 걸려 있었다. 김씨는 그 전에는 주로 일본에서 카메라를 수리해 왔는데, 이때부터 김씨는 그의 수리점을 단골로 이용한다. 김씨는 그가 파손된 라이카의 고무셔터 막을 일본제 120㎜ 카메라 셔터고무를 잘라서 재생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이것은 고도의 카메라수리 기술자만이 할 수 있다면서, 그런 기술력을 가진 사람은 일본에도 몇 명 없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라 해도 완벽하려면 ‘플랜지 백(Flange Back)' (렌즈부착 기준면, 즉 플랜지에서 필름 면까지의 거리)이 일정해야 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라이카 M3의 경우 그 거리가 27.8㎜인데 허용오차가 1백분의1㎜라는 것이다. 상-하, 좌-우의 모든 방향에서 이 거리가 정확하게 나와야 사진이 잘 찍히는데, 이 정도로 정밀하게 수리하는 기술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구식의 수동카메라를 사용하려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롤라이 110A이나 110E, 미놀타 472 등은 110㎜ 필름을 사용해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이런 필름을 구할 수 없어 일본이나 미국 등에 신청해야 하고, 현상할 때도 마찬가지로 외국에 필름을 보내야 한다. 지금은 값싸면서도 줌(Zoom) 기능, 플래시 장착 등 다양한 기능을 추가하여 셔터만 누르면 사진이 잘 찍히는 전자식 카메라가 많이 보급돼 있고, 즉시 전송도 할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도 언론사를 비롯하여 그 영역을 빠른 속도로 넓혀 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디지털카메라는 가격이 비쌌고 해상력도 떨어져 인기가 없었으나,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달해서 사진도 선명하고 카메라가격도 계속 하락하고 있어 일반인들도 많이 구입한다.
그러나 이처럼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잘 찍히는 자동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사진 찍는 기술은 떨어지고 있다. 예술적 가치가 있는 사진을 찍기 보다는 생일.입학.졸업.회갑 등 기념일을 기록하기 위한 사진 찍기가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그래서 개인이나 가족의 기록사진은 많이 찍어 보관하고 있지만 공적인 기록을 위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서울의 변화상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옛날의 종로나 청계천, 광화문거리의 모습과 60년대와 80년대의 모습, 현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관한다는 것이다. 명동의 거리에 나가 보면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그 사람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는 그가 가치 있는 기록사진이나 자료사진을 많이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카메라 수리 기술자들이 경력과 기술력 등을 감안하여 서로 인정하는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카메라기기기사협회’가 있는데, 전국의 회원이 60여명이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만나서 기술발전을 위한 세미나도 열고 정보도 주고받는 등 친목을 다지고 있다. 이 카메라기사협회 회원들이 ‘96아시안게임 때와 ’88서울올림픽이 열릴 때는 사진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카메라 안전요원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올림픽이 열릴 때 선수들이 테러로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가끔 있었고, 요주의 위험단체가 입국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정보기관에서 협조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기자나 일반인들이 사진을 찍는다는 구실로 아무에게나 카메라를 들이대게 되는데, 그 안에 무기를 숨길 수도 있으므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위험을 예방하는 임무가 카메라안전요원들이 하는 일이었다. 협회에 소속된 기사들이 올림픽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의 입구에 지켜 서서 관람객이나 사진기자들이 휴대하고 입장하는 카메라를 일일이 육안으로 검사하고 체크했는데, 회원이 많지 않아서 이틀마다 나가야 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뒤따라 개최되었던 장애자올림픽에서도 봉사를 했다. 국가적인 큰 행사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봉사했다는 뿌듯한 긍지를 느꼈던 때였다.
이 분야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그는 사진작가들과도 교분을 유지하고 친목도 다지고 있다. 사진작가협회에서 촬영대회가 있으면 카메라수리 기사들이 초청을 받아 같이 간다. 만일 촬영대회중에 가지고 간 카메라가 고장 나면 즉석에서 수리해 주기 위한 봉사활동의 일환이다. 가끔 그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출품했던 사진이 1993년에는 ‘잘 찍은 사진’으로 선정되어 사진작가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하는 일이 정밀기계를 다루는 일이라 그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신경을 집중시켜 고장부위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어떤 때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이므로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정씨는 등산을 가거나 가끔은 배드민턴을 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두 주일마다 한 번꼴로 등산을 가는데, 그때는 주로 몇몇 친구들과 함께 가기를 좋아한다.
그의 힘을 빼는 또 한 가지는 일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현실은 자동카메라가 일반화되고 있는데도 구형의 독일제 카메라만을 취급하고 있는 그는 일반인들이 카메라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부족하여 수리비가 무조건 비싸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다 보면 정밀한 수리가 안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카메라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다른 사람이 카메라를 함부로 다루는 것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한다고 했다. 지금은 카메라 값이 많이 내려서 집집마다 한두 대씩 있는 필수품이 되었지만, 취급방법을 잘 몰라서 자동용 건전지만 방전돼도 카메라가 고장 났다고 장롱 속에 넣어 두었다가, 실제로 못쓰게 돼서 버리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고 한다. 그런 것도 수리점에 맡겨서 수리하면 거의 새것처럼 된다고 했다.
그는 카메라 수리기술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이제는 숙련된 수리기술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마음 아프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도 구식카메라나 현재 단종 된 카메라를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과연 있을까. 그도 개인적으로는 같이 일하면서 틈틈이 기술을 전수하는 등 내심으로 공들이는 후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탁월한 기술력을 가진 수리기사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글; 박인환 전 조선일보기자)


extract from 한 길을 가야 인생이 보인다(김유경, 눈빛, 2001.09.10, 287p, ISBN : 8974099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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